내가 찾아서 읽는 책

[책이 있는 삶 33] 우리한테 반가울 책이란 무엇일까

등록 2007.10.04 11:50수정 2007.10.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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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밥을 떠먹여 준다면, 나는 손을 안 쓰고도 느긋하게 앉아서 냠냠짭짭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느긋하게 집을 수 없겠지요. 또한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밥을 푸지 못할 테고요. 이번에는 찌개를 뜨고 싶은데 떠먹이는 숟가락에는 김치가 들립니다. 배고파서 한 숟가락 가득 푸고 싶으나 체한다고 조금만 떠 주고, 배불러서 조금만 뜨고 싶으나 한 숟가락 듬뿍 떠 줍니다.

 

 갓난아기라면 어머니가 먹이는 젖을 물 겝니다. 조금 자라면 젖떼기밥을 먹겠지요. 조금 더 자라면 어른과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자기 밥그릇을 비울 테고요. 이렇게 아직 멋모르고 철없는 꼬맹이일 때는 어른들이 떠 주거나 차려 주는 밥을 먹습니다.

 

 나이가 차고 따로 살림을 하고 저마다 사랑하는 님을 만나 새 살림을 차리기도 합니다. 이때는 어버이가 차려 주는 밥상이 아니라 손수 차리는 밥상으로 아침과 낮과 저녁을 듭니다. 오로지 내 힘으로, 내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찾아, 내 몸에 맞추는 먹을거리를 마련하면서.

 

 아직 책나라를 모르는 꼬맹이나 철부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들도 누군가 뽑아 준 ‘추천도서목록’이나 ‘교양도서목록’이나 ‘베스트셀러 목록’ 따위에 기댈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책이름표를 기웃거리는 일은 아직 낯선 책이름을 익숙하게 하는 만큼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언제까지 이런 ‘책이름표’를 살피고 기웃거리고 기대야 할까요. 언제쯤 책이름표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기 머리와 마음과 생각과 삶에 걸맞는 ‘자기 책’을 찾아나설 수 있을까요. 누가 읽으라고 해서 읽는 책이 아닌, 자기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면서 찾는 책으로. 누가 좋다고 말해서 찾는 책이 아닌, 자기 스스로 그 책에서 무엇이 좋은지 알아내는 책으로. 누가 칭찬을 하고 누가 받들어 모시고 누가 늘 곁에 두는 책이 아닌, 자기 마음에 새기는 스승으로도 삼고 벗으로도 삼고 길동무로도 삼고 이슬떨이로 받아들이는 책으로.

 

a 내가 보는 책들 새책방과 헌책방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책들을 마음과 머리와 몸에 담습니다.

내가 보는 책들 새책방과 헌책방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책들을 마음과 머리와 몸에 담습니다. ⓒ 최종규

▲ 내가 보는 책들 새책방과 헌책방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책들을 마음과 머리와 몸에 담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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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조그마한 밭뙈기 하나 일굴 수 있어서, 자기가 먹을 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몸도 마음도 가장 살찌고 넉넉하고 아름다움과 튼튼함을 갖출 수 있다고 느낍니다. 제 밥그릇은 제 스스로 채우고 제 스스로 비우고 제 스스로 갈무리하거나 치울 수 있을 때, 비로소 홀로서기를 이룰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락을 어떻게 모로 키우는지, 모로 키운 뒤 언제 모내기를 하는지, 모는 어떻게 심는지, 모는 어떻게 자라는지, 볏모와 피는 어떻게 다른지, 피는 왜 안 먹는지, 피는 어떻게 뽑는지, 벼는 얼마 동안 자라야 누렇게 익어 가는지, 벼가 익으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벼는 물과 바람과 햇볕을 얼마나 받아야 알뜰히 익을 수 있는지, 알차게 익은 벼는 언제 거두어들이면 좋은지, 거두어들인 벼는 어떻게 갈무리하여 두는지, 갈무리한 벼는 어떻게 빻는지, 빻은 벼알은 어떻게 일고 씻어서 밥솥에 안치는지, 밥물은 얼마쯤으로 맞추고 뜸은 얼마나 들이는지, 이런 흐름을 찬찬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생각을 않습니다. 날마다 제 입구멍, 목구멍, 뱃속으로 굴러들어가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 밥덩이 하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모를 뿐더러 알려고도 않습니다. 그냥 받아먹을 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잇는 소중한 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하나도 모르거나 아예 눈길을 안 둔달까요. 그런 판이니, 자기 마음을 살찌우는 책 하나를 알아보는 눈길이나 알아보려는 눈높이도 스스로 다스리지 않는 듯합니다. 자기 먹성과 입성을 찬찬히 살피고 돌아보는 마음가짐이라면, 자기 읽성 또한 찬찬히 살피고 돌아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이어갈 텐데, 스스로 자기 길을 안 가고 있달까요.

 

 돈 몇 푼으로 이름난 밥집을 찾아가서 ‘맛집 나들이’를 즐길 줄 아는 요즘 사람들입니다. 돈 몇 푼으로 널리 알려진 책 하나 사들이면서 ‘두루 읽히는 좋다고 하는 책’을 읽고 새길 줄 아는 요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내 손맛 담긴 밥 한 그릇’ 펼쳐 보이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앞으로 살아갈 길을 헤쳐 나가면서 자기 마음을 살찌울 ‘내 삶을 고이 비출 책’ 하나 스스로 찾을 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이에요.

 

 널따란 ㄱ문고나 ㅇ문고에 가든, 그다지 안 넓은 동네 헌책방을 가든, 장서 숫자는 안 많다고 할지라도 시나 군에서 세운 도서관에 가든, 우리가 손에 들고 읽을 책이라면 ‘우리가 여태껏 꾸려 온 삶에 맞추어 앞으로 꾸려 갈 삶을 다스릴’ 수 있는 책을, 우리 스스로 고를 때가 가장 낫지 않을까요.

 

 저는 어제와 그제와 그끄제에 걸쳐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서른 권쯤 되는 책을 사들였습니다. 이제 이렇게 사들인 책을 가방에 담거나 자전거 짐받이에 묶고 시골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 책들은 제가 손수 찾아간 책방에서 한두 시간, 또는 서너 시간 조용히 둘러보고 살피면서 골랐습니다. 이 책들을 소개한 신문기사나 잡지기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책 평론가가 소개해 준 영광’을 못 받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반갑게 들어왔고, 제 손에는 반갑게 들렸습니다.

 

 《농업경제학 해설》(돌베개,1984). 《바벨2세》(AK,2007). 《미켈란젤로의 생애》(정음사,1976). 《미국민중저항사 (1)》(일월서각,1986).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해와달,2000). 《못난이 (1)》(서울문화사,1997). 《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그림 속 풍경이 이곳에 있네》(예담,2001). 《우상의 자리》(눈빛,2001). 《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1984). 《경제논쟁의 이론과 실제》(을유문화사,1959). 《마음의 조국, 한국》(범우사,2002).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3). 《권오길 교수가 들려주는 생물의 섹스 이야기》(살림,2006). 《조니여, 고이 잠들라》(삼성미술문화재단,1978). 《아코디언 주자》(민음사,1991). 《연변경제사》(연변인민출판사,1990). 《우리말 다듬기 자료집 2005》(국립국어원,2006). …….

 

 가만히 책장을 넘기면서 하나하나 고른 책들을 더듬어 봅니다. 두툼한 사진책이 있고, 해묵은 잡지가 있고, 나라밖에서 펴낸 어린이책이나 그림책이 있으며, 껍데기가 바래어 버린 낡은 책도 있습니다. 겉이야 어떠하든 알맹이를 읽고자 사들인 책입니다. 제 눈에 반갑게 들어왔고, 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줄 책입니다. 그래서 제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샀습니다. 그리곤 제 가방에 차곡차곡 담아 자전거를 타고 제가 사는 시골집까지 땀빼며 달려왔습니다.

 

a 책상맡에 책상맡에는 늘 여러 가지 책이 두루 자기 자리를 잡고는 제 손길을 기다립니다.

책상맡에 책상맡에는 늘 여러 가지 책이 두루 자기 자리를 잡고는 제 손길을 기다립니다. ⓒ 최종규

▲ 책상맡에 책상맡에는 늘 여러 가지 책이 두루 자기 자리를 잡고는 제 손길을 기다립니다. ⓒ 최종규
2007.10.04 11:50ⓒ 2007 OhmyNews
#책이 있는 삶 #책읽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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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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