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팔선 넘는 대통령 보면서 눈물 흘렸다"

고 윤이상 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 여성 리더들과 깜짝 만남

등록 2007.10.04 13:34수정 2007.10.0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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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모인 참석자들 첫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고 윤이상 선생의 딸 윤정씨, 가운데가 부인 이수자 여사 ⓒ 나정숙


지난 9월 16일부터 열리고 있는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2007 윤이상 페스티벌’ 참석을 위해 4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80) 여사가 출국을 하루 앞둔 2일 특별한 만남 행사에 참석했다.

‘번개팅’으로 급하게 마련된 이날 모임은 오전 10시 30분 광화문 정 갤러리에서 문화계·학계·여성계 등 각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14명의 여성 리더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수자 여사와의 환담으로 진행됐다.  


이날 모임에는 윤이상 선생의 딸 윤정씨를 비롯해 강보향 우먼라이프 편집장, 강정자 화가, 김명숙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김숙희 어린이문화예술학교 대표, 김은혜 부천생협 이사장, 류학열 윤이상평화재단 총괄부장, 민경숙 서울여성영화제 후원회 운영위원, 박현경 서울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 서명선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오유진씨, 이혜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정승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획실장,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한난영 서울여성가족재단 실장 등 16명이 참석했다. 

고 윤이상 선생의 음악애호가이기도 한 참석자들은 정운현 사무처장을 제외하고 뜻밖에 이수자 여사의 이화여대 후배들로 밝혀져 모임의 의미를 더했다. 이수자 여사는 자신의 입학과 관련해 “처음에는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여자가 의학과를 나와 무엇 하느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국문과로 전과, 1회로 졸업했다”며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교사로 근무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아침 일찍 장도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을 화제로 시작된 이날 모임에서 이수자 여사는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반세기 넘게 민족을 갈라놓은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떠나는 대통령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면서 “이제 삼팔선도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는 큰길이 되고, 더불어 큰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고 남북정상회담에 기대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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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 여사 ⓒ 나정숙

김은혜 부천생협 이사장은 “올해 처음으로 한국에서 고 윤이상 선생의 연주회가 열렸다. 윤 선생님 역시 영혼으로라도 조국과 만나셨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역사적인 날에 이수자 여사와 만나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이수자 여사는 "각계에서 활동하는 여러분들과 만나니 기쁘고 송구스럽다"면서 자신은 독일에 간 후에는 늘 남편 뒷바라지만 하면서 등 뒤에 숨어 지내 자유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윤이상 선생은 늘 집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작곡을 했기 때문에 집을 비울 수 없었고, 병환으로 누워 있을 때 역시 한시도 곁을 떠날 수 없었다고.


이 여사는 덧붙여 “이제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니 앞에 나와 일할 사람이 없어 고향을 떠난 지 40여 년 만에 남편의 거대한 이름을 안고 귀국해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면서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남편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린 일화를 소개했다. 

한편 동석한 딸 윤정 씨 역시 베를린 음대에서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결혼 후 파리에서 이응로 화백으로부터 그림공부를 한데 이어 미국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다. 음악과 미술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윤씨는 선생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94년 독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순회공연을 다녔다.

윤씨는 이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갈등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버지임을 떠나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정말 훌륭한 분을 모셨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참석자들과의 문답을 이수자 여사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 윤이상 선생의 동요작곡은?
"18~19세 때 이미 동요집을 출판할 정도로 여러 곡을 작곡했으며, 당시 문교부에서 발행하는 초등학교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6·25 전쟁 때 자료가 거의 소실돼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지난번 통영을 방문했을 때 어느 분이 당시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입수할 계획이다."

- 북에서 먼저 윤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 계기는?
"남·북한에서 모두 선생을 민주화(민족) 운동가로 보았고, 예술가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 초인가, 북한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하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김 주석으로부터 예술가로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으로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선생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1981년부터 매년 10월 윤이상음악회를 열게 되었고, 1984년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를 개소하였다. 또 평양에 거처도 마련해주어 얼마간씩 머무르며 교향악단원이나 성악가들을 지도했다. 지금도 선생의 직접 지도를 받은 단원들이 활동 중이다. 나중에 이 모든 일이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이뤄진 일임을 알았다."

- 선생과 관련된 조직적인 활동은?
"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조명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에 몇 개의 기관이 설립돼 활동하고 있다. 1984년 평양에 세워진 윤이상음악연구소를 비롯해 2005년 서울에  윤이상평화재단이 설립되었고, 독일에 윤이상협회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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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이수자 여사와 딸 윤정 씨가 참석자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 나정숙

제일 먼저 창립된 음악연구소는 15층 규모의 빌딩에 객석 600석의 음악당까지 갖춘 큰 연구소로 발전했다. 현재 교향악단원을 포함, 120여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다. 단원들은 모두 평양음악대학 졸업자로 60여명이 개인 연습할 공간이 마련돼 있으며, 민족음악연구실을 비롯한 연구사와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출판하는 출판사, 공연 관련 관리부서 등으로 나뉘어 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각종 기념사업 및 문화교류를 통해 선생의 음악정신을 기리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자 발족해 현재 국내외 음악회를 비롯해 윤이상평화상 제정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에는 딸 윤정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 현재 생활은 어떻게 하나?
"베를린과 평양에서 번갈아 머무르고 있다. 평양에 있는 집은 산속에 있어 서울과 달리 조용하고 사람도 별로 없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삼팔선이 누구든지 드나드는 큰길이 되고,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평양 집에 한번 모시고 싶다."  

- 선생의 음악은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선생의 음악은 현대음악이다. 그것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현대 음악의 기교에 덧붙여 동서양의 음악적 전통, 그리고 선생의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다. <고풍의상>, <광주여 영원히> 등은 이런 그의 정서가 잘 표현되고 있다. 평양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었을 때 정말 놀라웠다. 어떤 연주자는 연주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어렵게 느끼는 것은 그동안 음악애호가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때문이라 본다. 앞으로는 연주 기회를 자주 마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 기회가 된다면 선생이 직접 지도한 평양 관현악단의 남한공연도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선생의 명예회복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과감하게 일을 진행할 용기 있는 사람이 없어서 어려웠다. 이제 정부에서 제재했던 일도 해제됐고, 선생의 음악을 적극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약조도 했으니 잘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선생의 음악은 국제적이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이다. 선생은 민족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이다. 예술가로서 제자리를 찾아주면 좋겠고, 남과 북의 예술교류, 문화교류에 긍정적 요인이 되었으면 한다. 갈등을 화해시키는 것은 예술이다. 선생의 음악이 민족화해와 교류 협력에 디딤돌이 되길 기대한다."
#윤이상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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