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OB베어스
2위 삼성 라이온즈
3위 MBC 청룡
4위 해태 타이거즈
5위 롯데 자이언츠
6위 삼미슈퍼스타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에 본 <클릭>이란 영화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요즘 내 삶은 그리 재미있지 않다. 누군가가 “넌 무엇을 할 때 재밌니?”라고 물으면, 물론 나는 “글을 쓸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요즘 난 글을 쓰고 있는데 재미있지가 않다. 물론 인생이 항상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삶이란 순간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 다 집어 치우고, 순간과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재미없음’에서 오는 삶의 권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그 권태 자체를 즐기고 있다. 제길, 인생이 불쌍해진다.
쓸데없이 말이 길었다. 저기 위에 있는 순위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 물음을 던지려고 했던 것인데…. 우리는 이 순위를 통해 각 팀을 평가할 수 있다. OB는 제일 잘한 팀. 삼미는 제일 못한 팀. 좀 더 가치를 부여하자면, 상위권에 있는 팀들에겐 많은 노력과 운이 따랐다고 얘기할 수 있으며, 하위권에 있는 팀들에겐 상대적으로 노력과 운이 덜 따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삼미가 노력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의 야구를 했다.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도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이며 평범한 야구였고,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언제나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꼴찌라니.
롯데와 해태는 삼미보다 성적이 좋다. 그네들은 평범했던 삼미보다 더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 MBC는 해태보다, 삼성은 MBC보다 무진장 노력했을 것이며, 1위를 한 OB는 정말 뭐 빠지게 준비했는지도 모를 일. 우리는 지금 뭐 빠지게 공부하며 뭐 빠지게 돈을 벌어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인생의 1위를 향해? 아니면 꼴찌를 벗어나기 위해?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돼버린다. 노력을 무진장 많이 해서 1위를 한 것일까. 아니면 1위이기 때문에 노력을 무진장 많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내 주위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결과를 맛볼 수 있는 사람 수는 정해져 있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수는 헤아릴 수 없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과정을 통해선 결과를 ‘예측’하지만, 결과를 통해선 과정을 ‘평가’한다. 어쨌든 결과가 좋아야 노력도 인정을 받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잖아?
지금 6위인 내가 5위에 오르게 되면 지금보다 많은 자신감이 생길 것이고,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에서 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4위를 좇을 것이고, 3위, 2위…. 그야말로 뼈를 깎고, 허리가 휘도록 달리고 또 달릴지 모르는 일이겠지. 물론 나도 이런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지 자유로움을 꿈 꿀 뿐!
<삼미…>에서 작가는 얘기한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고. 작품 안에서 ‘나’ 가 또래 친구들보다 자신감이 없고 염세적이던 이유는 꼴찌 팀 삼미 잠바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촌이 사는 동네가 개발되지 않는 이유는, 그 동네 지역구 의원이 여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 나를 본 척 못 본 척 하던 동네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찾아와 주는 것은 내가 ‘일류대’에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그렇다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선 더 나은 소속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꾸지만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추측형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쉽긴 하다. 사실 나도 확신이 없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노력이란 과정은 어쩌면 소속을 바꾸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을 살 것 같으니까.
이런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꿈’을 물었을 때, 쉽게 명사형으로 답하던 때가. 판사, 작가, 시인, 파일럿 등등…. 그것은 직업적이며 단답형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이었으며, 더 정확히 말해서 ‘소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누군가 꿈을 물을 때 제일 먼저 이렇게 얘기한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유럽까지 연결된 철도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몇십일 동안 소설을 쓰고 싶다고’. 무엇이 되고 싶은 것에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으로 변했다. ‘된다’는 것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된다’라는 것은 너무도 피동적이다. 이미 만들어진 가치, 소속, 그 어떤 것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라는 것은 주체적이며 능동적이다. 같은 의미에서, ‘판사가 되고 싶다’라는 것과 ‘재판을 하고 싶다’라는 것에서도 차이가 느껴진다. 말 장난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한번쯤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클릭>이란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자기 인생을 마음껏 조절한다. 잠깐 멈춤을 할 수도 있고 빨리 감기를 할 수도 있다. 얼마나 좋은가. 그 힘든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라는 달콤한 열매만 맛볼 수 있으니.
성공을 갈망하는 주인공 역시 리모콘의 빨리 감기를 통해 회사의 ‘사장’이 되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도달한다. 하지만 만족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과정 속에 ‘그’는 없다. 그는 결과를 위해 과정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빨리 감기를 통해 성공을 얻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이다. 물론 나중에 후회한다. 그리고 그 리모콘이란 것이 존재 할 수 없듯이,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눈에 보이는 결과라는 것도, 달콤한 성공이란 것도 지금 내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지금의 노력과 과정이 결코 먼 훗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나’자신의 삶, 인생, 순간이다. 지금을 단순하게 과정으로만 바라봐서 바로 오늘을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찾아온 가을에 걸맞은 높은 하늘.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전해주는 여유. 느닷없이 찾아온 옛 친구의 반가운 연락.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사랑의 추억. 그리고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 이들까지. 모두가 소중하며 모두가 지금이다. 언제 나의 소속이 바뀌어 내 삶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난 내 소속에 맞는 일을 해나가면 된다. 그것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내게 주는 ‘재미’다.
2007.10.05 13:30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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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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