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서울발바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자리로 뿌리내린 만큼, 이제 저 하나 안 나가도 괜찮구나 싶어요. 다른 분들이 즐겁게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줄 테니까요.
이제 저는 제 삶터인 인천에서, 또는 인천 둘레에 있는 수원에서 지역사람들하고 자전거잔치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달마다 넷째 주 토요일이 되면, 자전거를 끌고 수원으로 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수원까지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전철을 탑니다. 쉴 틈 없이 책짐을 갈무리하느라, 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요 며칠을 보내느라 몸이 고단하고 기운도 많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전철로 움직이고 다음에는 자전거로 길을 뚫어 보리라 다짐합니다.
토요일 낮, 인천을 빠져나와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전철에 그득합니다. 구로에서 갈아타고 수원으로 가는 길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전철을 메웁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전철에도 사람이 많았을까요? 글쎄.
<2> 다시 사는 책
수원역에서 내린 뒤 자전거를 몰아 팔달문 쪽으로 갑니다. 수원발바리 잔치는 네 시부터. 네 시가 되기 앞서까지는 수원 헌책방에서 책을 즐길 생각입니다.
네 찻길로 된 수원 시내입니다. 거님길에는 페인트로 금을 그어 ‘자전거길’이라고 시늉을 냈는데, 따로 돌을 깐 것도 아니요, 페인트로 금만 그어 놓은 이런 길이 무슨 자전거길이냐 싶습니다.
설마 공무원들도 이런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닐까요? 공무원들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안 하기 때문에 흰 페인트로 금 하나 그어 놓고, ‘자, 수원 시내에는 이렇게 자전거길을 길게 마련했습니다!’ 하고 시 정책 홍보를 할까요?
공무원들의 볼꼴사나운 모습을 수원에서 새삼스레 느끼는 가운데 '오복서점' 앞에 닿습니다.
책방 앞에 자전거를 묶어 놓고 땅밑으로 내려갑니다. 처음 찾아오는 곳인 만큼, 사진은 책을 다 고르고 책값도 셈한 다음에 찍기로 하고 한갓지게 골마루를 둘러봅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은 <사진과 평론> 1호(1980.7.). 이 책은 갖고 있는 책이지만, 제가 가진 판은 워낙 낡고 책장이 떨어져서, 깨끗한 판으로 보이는 이 녀석을 새로 사들입니다. 새로 사들이는 김에 차례를 찬찬히 다시 읽으며 몇 가지 꼭지를 다시 살핍니다.
... 저자 와다나베 쓰도무(渡邊 勉)는 광고사진가 출신으로, 2차대전 뒤 <世界畵報>의 편집장을 거쳐, 그때까지 사진평론에 있어 불모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일본에서 사진평론가로서 독합력행한 사람으로, 전위적 사진론을 편 샤아프한 비평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78년 초 70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 사단에서는 최후의 사진평론가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그 방면의 제일인자였다. 그는 이 책을 비롯 <사진의 명작감상>, <오늘의 사진, 내일의 사진> 등 많은 저서와 전문지의 기고로 평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사진의 표현과 기법>은 그의 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이다... (125쪽)
<사진의 표현과 기법>은 여러 해 앞서 참 알뜰하게 읽으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글쓴이 와타나베 쓰도무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가 안 되어 있고, 인터넷으로도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사진과 평론>에 이분 책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해 주었군요. <사진의 표현과 기법>을 펴낸 출판사가 <사진과 평론>을 낸 '사진평론사'인데, 그 책에도 이렇게 글쓴이 소개를 붙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이 책은 단행본의 성격이 가미된 일종의 부정기간행물로서, 우선 1년에 4권 정도 발행할 예정이다.
부정기간행물로 펴내려고 한 <사진과 평론>은 모두 몇 호까지 냈을까요. 2호는 본 적이 있습니다. 궁금합니다. 적어도 한 해를 넘겼는지, 한 해를 넘겼다면 10호까지는 펴냈는지.
M.K.로울링즈/김성한 옮김 <춘하추동>(사상계사, 1956)이 보입니다. 흔히 '이얼링즈'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떠올립니다. 어쩌면, 이 작품이 처음 우리 말로 옮겨진 판일지 모르겠고, 다른 옮김판이 보인다면, 여러 권을 맞대 놓고 가장 읽을 만한 판을 가려 보아야겠어요.
만화책 황미나 <유랑의 별>(타임, 1997) (1∼4)을 봅니다. 조그맣게 나온 <장승 사진 모음집>(동작구, 1994)도 봅니다. 사진과 글은 다른 책이나 자료에서 모아 놓았지 싶습니다. 부락수호, 방위수호, 산천비보, 읍락비보, 불법수호, 성문수호, 기타로 나누었고, 서울 동작구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는 홍보자료로 엮었구나 싶어요. 동작구에는 '장승배기'라는 동네가 있어요.
이봉준, 송석범 <제주도관광>(정연사, 1965)은 1960년대에 한창 제주섬을 관광지로 꾸밀 때 나온 작은 책입니다. 차곡차곡 적어 놓은 1965년 앞뒤 제주섬 물건값이나 뱃삯이나 잠값 들은, 이제 와서 보면 따로 도움이 안 되겠지만, 지난날 물건값을 헤아리는 한편, 지난날 제주섬 사회와 문화를 돌아보는 자료로는 찾을 쓸모가 있습니다. 사이사이 곁들인 제주섬 사진은 인쇄가 썩 좋지 못해도 예전 모습을 되새기게 해 줍니다.
<3> 주머니 새는 소리가 들려도
坪內逍遙 옮김 <ハムレット>(中央公論社, 1933)는 제가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만, 눈에 뜨여서 고릅니다. 1933년에 일본에 옮겨진 <ハムレット>는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햄릿'으로, 일본 가나 그대로 읽자면, '하므레또'가 됩니다. 1950년대였나,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하믈렏'이었나, 이 비슷한 이름으로 번역된 책을 본 적 있어요.
그때는 '햄릿'을 그렇게 적기도 했구나 하고 지나쳤는데, 이 일본책 <ハムレット>를 보니, 일본사람이 옮긴 판을 고스란히 베끼면서, 책이름도 일본 가나를 읽는 소리대로 적었구나 싶더군요. 씁쓸하지만, 우리네 책 문화가 걸어온 모습 가운데 하나인 만큼, 소중한 자료로 삼고자 골랐습니다.
<수도여자중학교> 4회 졸업기념사진첩(4288)이 보입니다. 1950년대 졸업 사진책은 만나보기 어려운데 운 좋게 만납니다. 책값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책값으로 치를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으나, 오늘 부딪힌 이 책은 나중에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만날 수 있습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헌책방 헌책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수없이 느끼고 겪은 터라, 주머니가 솔솔 새어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고릅니다.
1955년에 나온 수도여자중학교 졸업 사진책에는, 반 사진은 작은 판으로 딱 한 장 붙이고, 옆에 학교 건물 사진을 자그맣게 한 장씩 붙입니다. 반 아이들 얼굴을 알아보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 구석구석을 헤아리는 데에는 좋습니다.
뒤쪽에 붙은 사진을 보노라면, 한강 인도교를 보며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때만 해도 한강에는 모래밭이 있었네요. 고무줄놀이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보입니다. 여느 졸업 사진책과 견주면, 중학교 계집아이들의 학교생활이 퍽 묻어난다고 하겠어요.
2007년 요즈음 졸업 사진책은 어떻게 나오는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마치는 학교 적 이야기를 담는 졸업 사진책에, 이렇게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만이 아닌 노는 모습'까지 함께 담아낼 수 있다면, 나아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거나 자는 모습, 낮밥 때 밥먹는 모습,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모습들까지도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아침에 학교에 오는 모습, 교사한테 꾸중듣는 모습, 철봉에 매달리는 모습, 학교 앞 문방구나 포장마차 떡볶이 모습, …… 이런저런 모습들 해서, 담을 만한 모습이 참 많지 싶어요. 이런 데까지 마음을 써 준다면, 아이들도 졸업 사진책을 소중히 간직하며 두고두고 자기 발자취로 삼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 수원 팔달문 앞 〈오복서점〉 / 031-243-5375
2007.10.06 11:56 | ⓒ 2007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