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에서 드잡이 질을 벌이던 흑백쌍용과 종문천, 그리고 반효의 신형도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으음”
“흐음”
나직한 신음성이 울리는 가운데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장내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과의 섭선이 찢겨져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이군 역시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풍철한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풍철한의 옷가지도 여기저기 뜯겨져 나가고 옆구리 쪽에서는 가는 혈선마저 보이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셔 창백해 보였는데 진기의 소모가 극심한 것 같았다. 허나 태산처럼 우뚝 서 있다가 다시 검을 수직으로 세우는 그의 모습은 만마를 호령하는 천신(天神) 같았다.
이미 흑백쌍용과 종문천, 그리고 반효의 싸움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여파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는데 어차피 드잡이 질을 하면서도 그들 모두는 함곡 쪽에 신경이 쏠려있었다.
호시탐탐 그 쪽 싸움에 끼어들 태세였고, 그러다 보니 자연 엄청난 풍철한과 이군의 격돌로 인하여 싸움을 멈추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설중행과 능효봉의 일행을 제외하고 함곡의 말에 의해 몸을 숨기고 있던 인물들도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채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몸을 숨길 때에는 멀쩡하던 우슬이 무화의 부축을 받을 정도로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또한 함곡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책하는 듯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내력을 간과하고 심력(心力)의 일종인 혼원잠을 과도하게 사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바로 흑백쌍용이 함곡을 노릴 때 혼원잠을 이용해 함곡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
내공이 탄탄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거리를 격하여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의 내력이 더 뒷받침되었다면 함곡을 완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여 흑영에게 함곡을 빼앗기게 된 사실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짝짝짝짝!
풍철한이 다시 입술을 깨물며 검을 치켜들고 공격을 하려할 때 갑자기 장내에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수를 친 사람은 상만천이었는데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나서며 감탄이 곁든 목소리를 발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세상에 풍철한이란 인물에 대해 진실로 알고 있는 인물이 얼마나 될까? 갑자기 호승심이 발동하는군.”
풍철한을 칭찬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에 나서는 것이고 그가 나선 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단 풍철한의 기세를 잠시 주춤거리게 만드는 효과와 풍철한의 뜻밖의 고강한 무위에 대한 자기 편 인물들의 두려움을 잠시 덜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상만천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그의 우측에서 갑자기 한 인물이 튀어 나왔다. 겨우 삼사 장 거리였는데 빛살 같은 속도로 상만천을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번쩍!
한줄기 희끗하면서도 핏빛을 머금고 있는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어둠 속이라 더욱 또렷한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그 섬광이 바로 연무각에게 인후를 반쪽 냈던 그것과 같은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상만천을 공격하려는 인물이 누군지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터였다.
어차피 상만천을 죽이려고 키워낸 남궁가의 핏줄이 아닌가? 그와 함께 있었던 설중행과 능효봉 일행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남궁정이 상만천을 죽이기 위해 최대한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안력이 뛰어난 인물들조차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연무각에서 인후를 정확히 두 쪽 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만천이 분명 두 쪽이 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정말 너무나 급작스럽고 빠른 것이어서 상만천이 피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었다.
“...!”
“...!”
상만천의 능력을 잘 아는 용추로서도 얼굴색이 검붉게 변할 정도였다.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흘렀다. 결과는 어찌된 것일까? 섬광이 사라지고 상만천과 그를 공격해갔던 남궁정이 미동도 없이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마른침 넘어가는 들렸다.
“역시!”
헌데 상만천의 입에서 약간은 나직하고 긴장된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너무나 조용한 탓에 그의 음성은 매우 또렷하게 좌중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어느새 은은한 금색이 감돌고 있었다.
“마교(魔敎)의 염황도법(閻皇刀法)은 무섭군.”
상만천의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진 채 남궁정의 검날을 쥐고 있었다. 왼손이 거의 머리 위에 붙어 놓인 상태였는데 황금빛이 감도는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선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이 들게 했다. 피는 팔목을 따라 가는 혈선을 그리고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염황도법은 과거 마교 교주의 좌우호위가 익혔다는 도법으로 수비를 배제한 채 몸을 아끼지 않고 오직 공격만을 위한 단 하나의 초식이 존재한다는 무서운 도법. 마교가 사라지면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도법이었다.
막은 것일까? 아니면 당한 것일까?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허나 분명한 것은 상만천의 몸이 두 쪽이 났다면 입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더욱 명백한 사실은 상만천의 오른손은 남궁정의 가슴을 파고들어 팔목만 보이는 상태여서 남궁정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란 것이었다.
“천잠보갑(天蠶寶匣)이로군.”
풍철한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상만천과 가까이 있던 위치였는지라 확실하게 볼 수 있었을 터였다. 천잠보갑은 수화도검불침(水火刀劍不侵)의 천잠보의와 마찬가지로 천잠사(天蠶絲)로 짠 수갑(手匣:장갑)을 말한다. 더구나 상만천이 낀 수갑은 매우 정교하고 얇은 것이어서 손에 착 달라붙어 피부가 보일 정도였다.
허나 수화도검불침이라던 천잠보갑도 남궁정의 검에는 견디지 못했는지 찢어져 피가 흐를 정도였으니 맨손으로 잡았다면 철사장(鐵沙掌)같은 무공을 수련해 손이 쇠와 같이 단단해 졌다 해도 아마 손이 잘려나가는 것은 물론 몸이 두 쪽 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염황도법을 검법으로 변식(變式)한 일초식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지.”
남궁가의 노가주가 상만천을 죽이기 위해 남궁정에게 고련시킨 것이 바로 염황도법이었던가? 그래서 아무 때나 사용하지 말라고 엄명을 준 것이었던가? 남궁정은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이지(理智)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익힌 검법이 염황도법이라는 도법의 변형임을 알았다.
‘실패했다!’
그것이 남궁정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기회만 생긴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일초식이 맨 손에, 아니 천잠보갑을 낀 손에 깨지고 그것으로 자신은 죽음을 맞았다. 어차피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일초식이었다.
“...!”
상만천은 입술 끝을 씰룩거리며 남궁정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오른손을 뽑았고, 동시에 뿜어지는 핏줄기를 손으로 막으며 살짝 밀자 남궁정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이 넘어가듯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심장이 으스러졌는지 여전히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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