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기억에 남는 공간이 있다면 어떤 곳일까? 아마도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이나 놀이터가 아닐까 싶다. 그 누구든 유년기를 보낸 향수가 평생토록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곳들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깊이 스며 들어 있기 마련이다.
내게도 어린 시절에 보냈던 특별한 공간이 있다. 동네에서 제일 높은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우리집과 측간,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양동이로 물을 퍼서 날랐던 동네 우물터,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야구와 축구, 나이 먹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던 동네 앞 산소.
지금도 그곳들을 생각하면 옛 정경이 선하게 떠오른다. 더욱이 명절을 맞이해 일 년에 한 두 차례 그곳들을 둘러 볼 기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곳이 환하게 들어온다. 세월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을망정 기둥과 터는 변함이 없다. 물론 그 공간들이 어린 시절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해진 것은 지울 수 없는 느낌이다.
황인숙 외 10인이 쓴 <나만의 공간>은 바로 유년 시절에 지녔던 각자의 공간을 회상케 한다. 물론 홍세화씨나 강금실씨처럼 '남산'이나 '교도소'와 같은 특정 공간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유년기를 뛰어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유년기는 그들 모두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 책에 묶인 글들은 그 하나하나가 저자들의 개인성을, 이질적 기질과 취향과 세계관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이 글들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저자들 자신만의 공간을 이룬다. 그러나 그 공간들은 서로 불화하지 않는다. 그 공간들은, 그 개성적 목소리들은 너그러운 조화 속에서 은은한 맥놀이를 만들어내며 또 다른 스테레오 공간을, 목소리들의 연희를 이룬다.(편집인의 말)
어린 시절의 공간이든 나이든 기억 속의 특정 공간이든 보통 그곳은 지금에 들어 다른 형태로 변해 있다. 어릴 때 살았던 옛 초가집과 측간은 완전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했고, 동네 앞 우물도 터만 있을 뿐 모두 수돗물을 마신다. 옛 동네 앞 도로도 죄다 큰 길로 나 있고, 역전도 그 철길의 자취만 아스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모두 똑같은 초가집에 살았거나 공동 우물을 퍼날랐던 것은 아니다. 진중권씨는 개척교회 목사를 했던 아버지 덕에 동네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고, 황인숙씨는 옥탑방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이 그녀의 심상을 지배하고 있고, 조선희씨 역시 유년기의 경포바다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120쪽)
이는 나희덕씨가 담양에 있는 한 시골 빈 집을 구하려다 그 주인으로부터 듣게 된 소리다. 선문답 같은 소리로 인해 그녀가 그 집에 대해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순 없었지만 그런데도 거절당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단다. 그 공간을 지켜주려는 그 분들의 마음이 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까닭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혼자만의 공간을 '꿈꾸었다'고 나는 분명히 말했었다. 그런데 한 번도 나만의 공간이 주어지지 않아 서러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게는 언제나 나한테 맞는 나만의 공간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여럿이 살면서 나는 몸이 컸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영혼을 살찌웠다. 그랬다는 것을 내가 깜빡 잊었다.(197쪽)
이는 공선옥씨가 쓴 글이다. 이 글을 읽자니 나도 그렇지만 중년을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하지 않겠나 싶다. 어린시절 집안식구들이 많았던 까닭에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한 방에 두세 명이 함께 살고, 화장실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그 시절에 어찌 나만의 공간을 꿈엔들 꿀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오히려 여럿이 함께 살던 그 공간이 자기 자신을 살찌게 한 공간이라 역설한다. 힘들지만 여럿이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았던 그 시절이야말로 서로 배려하는 넉넉한 공간이었고, 서로 이해심도 깊었던 가슴 따뜻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중년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유년기 그 공간이 비좁았던 게 사실이지만, 한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살찌우게 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넓은 공간도 없지 않았나 싶다.
2007.10.08 16:13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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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공간 - 우리시대 지성 11인의 삶과 시공간 이야기
황인숙 외 지음, 고종석 엮음,
개마고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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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자던 그 좁은방이 내겐 더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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