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울리는 공습사이렌, 촌스럽잖아

[주장] 심리적 압박 주는 훈련의 희극은 재고해야

등록 2007.10.16 07:25수정 2007.10.1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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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362차 민방공 훈련이 실시된 10월 15일 오후 2시부터 15분 동안 차량이 모두 멈춰선 서울 대학로 거리. 사진 왼쪽 중간에 민방위 깃발이 보인다.

제362차 민방공 훈련이 실시된 10월 15일 오후 2시부터 15분 동안 차량이 모두 멈춰선 서울 대학로 거리. 사진 왼쪽 중간에 민방위 깃발이 보인다. ⓒ 김종성


10월 15일 오후 2시 제362차 민방공 대피훈련이 실시되었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서 거리를 장악한 유도요원들이 15분간 시민과 차량의 이동을 통제했다.

초중등학교 때에는 딱 한 번 화재대비훈련에 실제 참여했을 뿐, 그 외에는 언제나 걸상을 책상 위로 올리고는 교실 바닥에 엎드린 채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곤 했다. 어쩌면 하교 후에 밖에서 노는 시간보다도 교실 안에서 그렇게 지내는 시간이 더 재미있었던 듯하다.

지금은 예전만큼 시민들의 참여가 그리 적극적이지 않지만, 아직도 민방공훈련 때에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기가 어쩐지 어색한 게 사실이다. 물론 자동차는 예나 지금이나 꼼짝 못하고 정차할 수밖에 없다.

15일 오후 2시의 공습 사이렌 소리는 여전히 우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묘한 마력을 갖고 있다. 완장 찬 유도요원들의 호루라기 소리도 시민과 차량의 이동을 제어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진 듯 하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정된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의 대로에서 일률적으로 시민과 자동차를 15분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니고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정치는 짧고 기업은 영원하다지만, 민방공 공습 사이렌의 위력만큼은 재벌 회장의 불호령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교실 바닥에 엎드리던 추억의 민반공... 그리고 지금은

잊을 만 하면 어김없이 귓속을 때려대는 공습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민방공 훈련이 정말로 훈련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훈련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함의들이 민방공 훈련 속에 존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민방공 훈련이라고 하는데, 그 '훈련'이라는 말이 언제나 귀에 거슬린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민방공 훈련의 이미지는 공습 사이렌, 완장 찬 유도요원, 한산한 거리, 불평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뿐이다. 훈련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동적'인 것인데, 우리가 아는 민방공 훈련의 이미지는 한없이 '정적'이기만 하다.

이것이 정말로 훈련이라면, 그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훈련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민방공 훈련에서 실제로 훈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화재 등의 재난을 대비하는 훈련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건물 안에 그냥 있거나 거리 모퉁이에 서거나 아니면 책상 밑에 엎드려 있을 뿐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대피훈련이라고 하지만, 적극적인 신체의 움직임이 없이 그저 가만히 있는 상태를 훈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훈련이란 신체나 정신의 움직임을 통해 모종의 기능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훈련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훈련이라면 훈련에 실제 참여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해야 할 텐데도 훈련과 관계없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이것의 본질이 훈련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화재보다도 수재나 교통사고가 훨씬 더 심각한 재난인데 민방공 훈련에서는 화재만을 주로 다루고 있으니, 이는 권력이 민방공 훈련을 통한 방재 효과에 그다지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는 것이 훈련? 전 국민이 다 하는 게 훈련?

이처럼 민방공 훈련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훈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민방공 훈련이 훈련의 효과보다는 다른 모종의 효과를 발휘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방공 훈련은 실제로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을까? 화재훈련에 참여하든 길거리에 서 있든 책상 밑에 엎드려 있든 간에 모든 국민들이 민방공 훈련을 통해 똑같이 경험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서 모든 시민들은 일단 멈춰서지 않으면 안 된다. 차량을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로를 마음대로 활보할 수도 없다. 이를 무시하면 완장 찬 사람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하고 사이렌 소리를 위반한 시민은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할 수밖에 없다.

차량은 물론 전 국민을 '일단 멈춤' 시킬 수 있는 공습 사이렌을 들으면서 시민들은 강력한 권력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권력의 견인력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런 사이렌 소리에 자동차나 발걸음을 멈추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방공 훈련의 숨은 의의는 바로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 개개인에게 권력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복종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방공 훈련의 15분 동안 모든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미치는 효과일 것이다. 재난대비훈련에 참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이 효과만큼은 공통적이라면, 민방공 훈련의 실제 의의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권력자나 정부 당국자들이 민방공 훈련의 그런 측면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부터 행해진 일이므로 그저 습관적으로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민방공 훈련 속에서 일종의 심리적 폭력을 통해 국민을 길들이는 본질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독일의 나치돌격대와 한국의 민반공 훈련

'심리적 폭력'이란 조건반사(conditioned reflex)의 원리를 이용해서 인간의 심리에 강제를 가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폭력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집단이 바로 나치와 파시즘이었다. 국내 정치학 이론서에 인용되는 서지 채코틴의 <대중의 침탈>에 나오는 나치의 예를 보자.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들은 하켄크로이츠(卍) 완장을 찬 나치돌격대(SA, Sturmabteilung)와 히틀러친위대(SS, Schutz-Staffel)의 위압적 모습을 평소에 자주 목격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완장만 보아도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독일 국민들은 나치 권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의 효과는 투표일에 잘 나타났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죽어도 나치당에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도 막상 투표장 주변에 배치된 돌격대 및 친위대 요원들의 완장을 보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유일한 권력인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으면 나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심을 느낀 유권자들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나치당을 지지하게 된다. 일상적 삶 속의 대화에서는 분명히 나치스를 반대하는 것 같던 국민들이 막상 비밀이 보장되는 투표장에 가서는 엉뚱하게도 나치스를 지지하는 데에는 그런 심리적 폭력장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치스의 방식과 민방공 훈련이 외형상으로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심리적 폭력을 통한 국민 길들이기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훈련이라고 볼 수 없는 이 민방공 훈련을 통해 한국의 권력은 자신의 존재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복종을 강제하는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공습 사이렌, 군사독재자나 써먹을 수법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21세기 시점에서는 너무 고전적인 듯 하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맞을 법한 방식이 아닐까? 10월 1일 국군의 날만 되면 굉음 소리를 내는 전투기 편대를 서울 시내에 띄워 시민들의 고막을 자극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저항심을 무디게 하는 고전적 '수법'을 구사하던 군사독재자들이나 쓰면 딱 알맞을 법한 방법이 아닐까?

TV나 신문·인터넷 등으로 얼마든지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 또 국민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21세기 권력이 민방공 공습 사이렌 같은 고전적 수법을 구사하는 것은 그리 세련되지 못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국민과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할 수 있는 세련된 방식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민방공 공습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길 가는 사람을 붙들어두는 한가한 불량배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똑똑한 후임 병사를 길들이기 위해 아무 이유도 없이 '차렷'을 연발하는 콤플렉스 많은 선임병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민방공 훈련이 훈련같지 않은 것은, 말만 훈련일 뿐 재난대비의 효과를 별로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귀중한 시간만 빼앗으면서 권력의 권위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민방공 훈련을 진정한 의미의 훈련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시민들에게 보다 더 절실한 수재나 교통사고 등에 대비하는 훈련으로 내실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훈련과 관계없는 차량이나 시민들의 발걸음을 15분씩이나 붙들어두는 '희극'은 재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민방공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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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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