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정말 용서받지 못할 친구로군.”
성곤의 음성이 노기에 부르르 떨렸다. 벌떡 일어나는 모습 역시 당장이라도 중의를 때려죽이려 들 태세였다.
“재미있는 일이야….”
운중의 나직한 말에 성곤은 잠시 주춤했다. 문득 운중의 시선이 뒤로 돌자 좌중의 시선 역시 운중의 시선을 따라 돌았다. 매달려 있는 금조롱. 상만천이 들어오면서 운중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금조롱이었다.
조롱 뿐 아니라 그 안에 갇혀있는 참새 두 마리마저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금으로 정교하게 만든 바로 그것이었다.
“상만천이 대놓고 나를 조롱하더니, 결국 친구마저 나를 끝까지 실망시키는군.”
운중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다. 누가 듣더라도 노기가 섞인 음성은 아니었다. 다만 씁쓸한 탄식처럼 들렸다.
“자네를 조롱한 것은 아닐 걸세. 경고를 한 것이겠지.”
성곤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곤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선물로 받은 장본인으로서는 조롱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저 금조롱의 의미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터. 참새의 크고 작음은 바로 과거에 살해당한 운중의 처자식임을 뜻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금으로 화해 있음은 이미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그랬듯이 회의 뜻에 어긋나면 저 꼴이 될 수 있다는 강한 암시다.
“어찌되었든 끝까지 나를 가만 두지 못하는군.”
운중이 술잔을 들고는 훌쩍 마시자 중의는 미세하나마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언제나 두려운 대상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같이 앉아있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 정도로 두려웠다.
“그래도 다행이야. 자네는 무형독의 해약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군.”
운중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중의는 섬뜩한 느낌에 급히 대답했다.
“무…무슨 소린가? 무형독은 해약이 없네.”
말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오고 떠듬거렸다. 운중이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용독(用毒) 솜씨야 귀신마저 탄복할 지경이지. 하지만 자네는 자네까지 죽일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야.”
무형독을 언제 사용했을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연 대상을 골라서 무형독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해 이 방안의 모든 사람에게 하독한 것이다.
“더구나 저 아이!”
운중은 턱으로 추교학을 가리켰다. 중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네…”
황급히 말리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무슨 염치가 있어 발설하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중의의 얼굴에 절망스런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네, 자식까지 무형독으로 죽이려 하지는 않았겠지.”
“옛?"
그 말에 장문위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의 얼굴에 극도의 경악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비명이라도 지를 뻔 할 정도였다. 더구나 정작 본인인 추교학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그렇다고 사부가 농담할 인물은 절대 아니다.
“제자가…중의어른의?”
중의에게 묻지 않았다.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는데 오히려 사부를 보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중의에게로 향했다.
“그…그건….”
중의가 나서려 하자 운중이 고개를 흔들며 먼저 대답했다.
“맞다. 네 부친이 바로 이 분이지. 동정오우 중 한 사람이자 너를 위해 모든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친구와의 의리나 신뢰 따윈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이다.”
이것은 매우 심한 욕설과 다름없었다. 운중의 입에서 이렇듯 친구를 비난하는 말이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좌중은 조용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할 것이 없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운중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과거에 몇 번에 걸쳐서 자네가 말한 무형독에 대해 들은 바 있네. 물론 처음에는 해약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 해약을 만들기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고 말한 적도 있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운중은 확실히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친구였다. 단순한 말 몇 마디로, 혹은 조그만 단서로 전체를 추리하는 무서운 친구였다. 자랑스럽게 떠벌린 자신의 스쳐 지나가는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자네는 그 이유가 바로 무형독이 가진 특성 때문이라고 했다네. 무형독은 자네가 몇 가지 치명적인 독을 섞어 만들었다고도 했네.”
“…”
“다만 치명적인 독은 악취가 나고, 피부에 닿으면 짓무르거나 부풀어 올라 금방 상대가 알아차리는 단점이 있어 사용하기 까다롭지만 온갖 노력 끝에 치명적인 독성은 살리면서 무색무취무감(無色無臭無感)의 무형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한 말은 기억하고 있나?”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처음 무형독을 만들었을 때 그런 말을 했고, 그 후 무형독을 사용하면서 해독약이 없는 관계로 하독에 매우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 한 적도 있었다. 자신도 자칫 중독될 수 있다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있었다.
“자네는 매우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군. 그래서 해약을 만들 수 없었다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한 말이었다. 참아야 한다. 인내는 분명 달콤한 대가를 준다. 어차피 무형독에 중독 되고 열두시진이 지나면 모두 죽게 된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조금 지나면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자네는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아니, 절대적으로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알 정도의 해약을 만들지는 못했을 테니까.”
무슨 뜻일까?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중의의 얼굴색이 홱 변했다. 정말 이 친구가 그 내막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해약에 대해 또 다른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자네는 해약을 만들려고 노력했네. 그러면서 해약을 만드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무형독이 몇 가지 치명적인 독을 섞은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없다고 했다네. 또한 더 큰 어려움은 그 몇 가지 독약이 인체에 미치는 작용이나 퍼지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고도 했네.”
운중의 말에 중의는 더 이상 놀랄 겨를도 없었다. 이미 이 친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과거 자신이 한 몇 마디의 말로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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