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계절의 시] 홍일표의 <낯선 길>

등록 2007.10.17 10:18수정 2007.10.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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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길은 몸을 던진다. ⓒ 김석중

▲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길은 몸을 던진다. ⓒ 김석중
 
넘치는 것들은
스스로를 벗어난다
하루를 버린 해가 서산을 넘듯
철새는 날아간다
인륜을 버리고 천정의 길을 간 허균처럼
철새는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제 속의 것을 억누르지 못해
아비를 버리고
둥지를 버리고
꽉 막힌 하늘과 지상
그 가운데를 긴 칼로 내리 그은
수평선,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철새는 몸을 던진다
볏단들이 줄줄이 묶여 쓰러지는 동안
오래된 길을 버린 날 짐승들,
마침내 신성의 하늘을 난다.
<낯선 길> -'홍일표'
 
 가을의 하늘을 우러러 보면 일렬종대로 줄지어 아름답게 날아가는 새들의 길과 마주친다. 그들의 길은 하늘의 길이다. 그들의 자연의 길을 생각하다보면 길 안의 길이란 또 얼마나 지루한 반복인지… 또 길에서 멀리 떨어진 길은 또 얼마나 외로운지…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넘치는 것들은 스스로를 벗어난' 길이 되어 저 홀로 멀어진다.
 
바다가, 강물이, 눈물이 넘치는 길의 이정표는 어디에도 없다. 시인은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신성의 하늘을 나는 새의 길을 형상화 하고 있다.
 
'볏단들이 줄줄이 묶여 쓰러지는 동안 오래된 길을 버린 날 짐승들 마침내 신성의 하늘을 난다'고, 이 새의 길은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는 전생의 길 하나를 가리킨다. 
 
새의 길의 이정표는 태양과 별과 달이다. 이 길은 자연에서 시작하고 자연으로 돌아 가는 신성의 길이다. 인간의 신성의 길은 사실 내 안에 있는지 모른다. 내 안에서 끓어 넘치고,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내 안에서 주저 앉는 길 그리고 우뚝 일어서는 길 …'내 안에 내가 신전을 세우는 길 말이다.
 
시인이 말하는 아비를 버리고 둥지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은, 자연회귀의 길이다.
여기서 '꽉 막힌 하늘과 지상 그 가운데를 긴 칼로 내리 그은 수평선,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철새는 몸을 던진다'고 아주 낯설게 표현한다. 이 낯선 표현의 길을 만나기 위해 시인은 숱한 시의 길을 버린다.
 
지구의 반복되는 길은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죄 때문은 아닐까.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지구의 길에서 어떤 길이든 자신이 정한 출발점에서 다시 돌아와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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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구름의 길, 바람의 길 새들은 돌아오기 위해 수평선을 건넌다 ⓒ 송유미

▲ 사람의 길, 구름의 길 바람의 길...새들은 돌아오기 위해 수평선을 건너다 ⓒ 송유미
 
 어떤 꿈이든 초발심으로 돌아와야 새롭게 시작한다. 시작부터 수없이 엉클리고 꼬이는 운명의 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길을 향해 간다. 그러나 길은 주인이지만 나그네의 것이다. 나그네가 그 길의 방향을 잡아서 걸어갈 뿐이다. 인생이란 길은 시인이 이야기하는 <낯선길>과 다름없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 날마다 아침이면 우리에게 문을 노크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이 아닌 곳에 접어들어 있다. '이 길이 아닌데, 이 길로 가면 안되는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하면서 반복된 낡은 길을 가고 있다. 한길만 고집하며 걸어가는 길이란, 많은 길을 그리워하는, 한길에 대한 후회의 길로 남을지도 모른다.
 
홍 시인은 수 없이 길을 만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낯설게 안내한다. 벼의 짚단들이 하나 둘 쓰러져 누운 가을 벌판을 가로 질러 저 수평선의 꽉 다문 입술 속으로 사라지는 철새들의 길은, 내세의 멀고 먼 여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새들은 유빙의 한계선을 향해 나침판도 없이 그들의 날개털 하나 하나, 고정밀의 디지털 안테나가 되어 정확하게 출발점에 돌아온다고 한다. 단 한 마리의 낙오병이 없는 귀향을 꿈꾸는 그들의 날갯짓이 파란 가을 하늘을 오래도록 우러러 보게 한다.
2007.10.17 10:18 ⓒ 2007 OhmyNews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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