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나 다름없었던 카드는 여섯 시간 동안 공중전화 부스 안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이찬수
부지런히 도착해 허름한 공중전화 보호대 문을 여는 순간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내 은행 카드가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단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들 휴대전화를 쓰니 어쩌면 그 공중전화에는 나 이후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 거의 6시간 동안 카드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나는 현금이나 다름없는 그 카드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카드를 들고 나는 바로 근처 우체국으로 향했다. 은행 직원 말마따나 우체국 현금 인출기에서 현금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번 더 다행이었다. 동경의 외곽 한적한 동네우체국 뒤로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한 뒤 이 날의 느낌을 남겨놓으려 한국에서 쓰던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수십 여 개 의미 없이 깔려 있는 바탕화면의 아이콘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삭제해도 되는 아이콘들은 정리해야겠다 싶어 이리 저리 마우스를 클릭 하다가 뜻밖에 가수 윤도현의 거의 모든 노래가 담겨 있는 폴더를 하나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윤도현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나의 아들이 저장해놓은 곡들이었다. 이것이 바탕화면에 있었는데 그동안 전혀 몰랐다니…. 여러 음악 파일 중 눈에 띄는 노래가 있었다. 언젠가 딱 한 번 듣고는 인상적이었다가 그 뒤로는 전혀 들을 기회가 없었던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였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나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서정적이면서 깊이 있는 가사가 좋았고, 멜로디는 반복적이었지만 따뜻함과 강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그 노래 분위기에 푹 빠졌다. 반복해서 수십 번 들었고, 외워버렸다. 일 년 이상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하던 이 노래가 뜻밖의 상황에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내게 이렇게 묘한 감동을 주다니 역시 세상 이치는 다 알 수 없었다.
6시간 동안 현금카드를 공중전화기 옆에 고스란히 놓아주었던 그 “아름다운 것들이” 노래 가사처럼 “오래 남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가수가 고마웠고, 이 노래를 나도 모르게 컴퓨터에 저장해준,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일지, 두 사람일지, 아니면 전혀 없었을지 모르지만, 공중전화기에서 그 카드를 보고도 그대로 둔 이가 고마웠다.
이런 고마움들이 내가 일본으로 오게 된 흔치 않은 상황과 미묘하게 어우러졌다.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아름다운 것들이 오래 남도록” 하는 일, 내가 할 일은 그런 것이어야 하리라는 생각에 날 새는 줄을 몰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찬수씨는 종교다양성을 가르치다 부당하게 해직된 전 강남대 교수로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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