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현실문화연구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과 글을 담고 있는 책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라는 부제가 잘 말해주고 있듯이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지금까지 모두 12권을 출판한 그의 개인 사진집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사람’은 그가 50년 동안 사진 작업을 하면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주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100여 점이 넘는 그의 사진 작품들도 단 세 점을 빼놓고는 모두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국 코닥 사의 조사에 의하면 매년 만들어지는 사진의 90% 이상이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니, 인물 사진으로만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뭐 그리 유별난 일이냐고?
하지만 그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최민식의 전 작품들 중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 책에 수록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최민식의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고 압도적이어서 보는 이의 가슴으로 곧장 육박해 들어와 강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자, 그 면면을 한 번 보도록 하자.
거리의 모퉁이에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 국숫발을 빨아올리고 있는 여자 아이, 제 나라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지나온 삶의 굴곡만큼이나 깊고 거친 주름살들이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노인, 고무가죽으로 감싼 아랫도리를 질질 끌면서 사람들의 자비심을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지고 열차 칸에서 나오고 있는 시골 아줌마들….
열거하자면 한이 없는,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바로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얼굴들이다. 그 슬픈 얼굴들에서 우리가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가 애써 잊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동시에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민식은 서른 살 무렵 사진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단 한 순간도 그 얼굴들을 잊지 않았고 또 외면하지도 않았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인생이 끝나고 삶이 죽음으로 변화하는 그 순간에 당신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그때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추억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오랫동안 소외받은 이들을 나 자신과 함께 나누어 왔다. 그들과 나는 섞여 짜인 직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을 제외한 어떤 제스처로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 중량의 힘으로 그들을 안았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내 마음속의 빈 곳이 채워지고 안도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31쪽)이처럼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마치 ‘섞여 짜인 직물’인 양 한 몸처럼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어린 시절 그가 겪은 뼈저린 가난의 체험이 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체험을 시대와 세상과 연결시켜 생각할 줄 아는 깨인 역사 의식, 그리고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 오히려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끼는 역설적인 미의식을 그가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50년을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외길 인생을 살지 못했으리라.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와 마더 테레사 수녀, 그리고 화가 밀레와 작곡가 베토벤의 삶과 예술도 그에게 이러한 인생관과 예술관을 심어주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은 차라리 인생의 벗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182쪽)진부할 수도 있는 이러한 깨달음은 몹시 소중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삶과 세상을 바라보면 전과는 전혀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선으로 다시 최민식의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 종이거울 속에 떠오른 슬픈 얼굴들은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도 꼿꼿하게 피어 오르는 생명력과 가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민속학자 김열규 교수가 책 끄트머리에 부친 글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인간을 향한 개안(開眼)’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눈뜬 우리의 시신경이 결국 가 닿는 곳은 머리가 아닌 가슴일 터이고, 그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사랑일 터이다. 그래서 최민식은 이 책을 펴내면서 ‘세상을 위해 나의 사진은 사랑을 담으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카메라와 선한 의도 그리고 숙련된 기술과 재능만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사진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다 사진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재능을 살리기 위한 치열함이다. 사진에 필요한 끈기와 집념으로 창작하려는 끈질긴 근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사진가의 재능이다. (97쪽)김열규 교수가 계산해 놓은 최민식의 작업량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사진가로서의 진정한 재능을 갖춘 사람임을 알게 된다. 매일 36장짜리 필름을 15통씩 찍어댄 작가, 그리하여 한 달이면 1만6200장, 한 해면 자그마치 591만3000장을 찍어댄 작가가 바로 최민식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한 작업을 한두 해가 아니라 50년 동안이나, 그것도 오직 ‘사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만 매진해 왔으니, 그가 찍은 사진에 인간의 혼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3.
이처럼 최민식은 단순히 사람의 겉모습을 찍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넋까지도 포착해서 사진 속에 담아냄으로써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진작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한평생 ‘사람’이라는 하나의 주제만을 파고 든 열정의 승리인 동시에 흑백 필름 사진만을 고집한 뚝심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1967년 최민식이 ‘스타 사진가’로 선정이 되어 영국 <사진연감>에 그의 사진들이 실렸을 때, 한 평자는 그를 두고 ‘카메라의 렘브란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흑백 사진들이, 어두운 창에 비치는 희미한 빛으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했던 렘브란트의 그림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흑백 필름이야말로 인간의 진실을 가장 잘 담아내는 사진 매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디지털 카메라가 아무리 위세를 떨치더라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리고 흑백 사진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얼굴을 찍어 나가는 그의 작업은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찍은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 그 슬픈 표정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며 나도 그들이 들려주는 서러운 인생 얘기에 맞장구도 쳐주고 웃기도 하면서,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그들은 바로 어린 시절의 나이며, 내 누이이며, 내 부모이며, 내 삼촌이며, 내 할머니이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을 찍는다. 볼품없이 일그러지고 불쌍한 자들이 곧 나라고, 생존의 무서운 슬픔을 느껴 보라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사는 외로움을 보라는 외침을 듣는다. 내가 전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결하여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다. 사진 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