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의 주장은 아직은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우려할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지지율이 50퍼센트를 넘나드는 이명박의 교육공약은 당장 우리 눈앞의 위험이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 직을 맡을 5년 동안 빚어질 혼란을 치유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대통령 후보로서 그가 내놓은 답안은, 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빵점이다. 좋은 글이 되려면 적어도 그 앞뒤의 문맥은 일관되어야 한다.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공약은 적어도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일관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문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계획은 결국 공교육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드는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문제를 제시하고 같은 답안을 제출했다면, 나는 기꺼이 100점을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육을 사업체로 생각하는 사학재단과 사교육업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환경은 무엇인가’라는 정도라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일관된 논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답답한 것은 그 좋은 미국대학을 나온 박사들이 이 빵점짜리 답안지를 만드는 데 협조했으며, 누가 보아도 분명한 이 빵점짜리 답안지를 아직도 100점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유명한 대학교수들이라는 점이다. 번쩍거리는 명함을 들고 나름대로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그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이명박의 교육공약은 빵점짜리
그의 교육공약은 빵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그의 체계에서 가장 먼저 짚어야 했던 대학개혁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준화를 주장하는 이해찬은 시장개념을 학교에 도입하면서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렸다. 마찬가지이지만 이번에는 상반된 방식으로, 미국식 교육체계를 원하는 이명박은 현재의 우리 대학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빼놓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명박 교육공약의 모델인 미국의 대학들은 무척 다양하며 특성화 되어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성과를 내는 하버드나 MIT와 같은 유명한 사립종합대학교들만이 아니라 각 분야별로 명성을 갖고 있는 주립대학교, 기초적인 교양교육에 전념하는 칼리지 대학, 혹은 줄리어드 음대처럼 종합대학이 아니면서 한 분야의 전문교육에 전념하는 학교들에 이르기까지. 이 다양성이 사실 미국식 체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대학들의 변화를 제쳐둔 채, 평준화의 해체와 입시제도의 변경만을 언급하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자초한다. 물론 긴 시간을 거치면서 부실한 대학들부터 무너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체제가 도입된다면 각 대학들이 특성화를 통해 제각기 살 길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적절한 유도 없이 이를 대학들을 시장경쟁에만 맡겨놓는 것은, 부패한 사학재단의 이해만을 생각하면서, 그 동안 그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문민정부 이전에 행해진 부실한 대학의 허가로 헛된 시간과 돈을 낭비했던 젊은이들을 알고 있다. 책임을 지고 변화해야 할 곳에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그의 공약이 빵점인 이유이다.
두 번째로 그는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면서 100개의 자율형 사립고를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사교육비의 증가가 가고 싶은 학교 수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립형 사립고 많아지면 사교육비 줄어들까?
그런데 과연 좋은 학교들이 많아지면 사교육비가 줄 것인가?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왜 고교평준화가 도입되었는가? 과도한 입시경쟁과 과외열풍이 그 이유가 아니었던가? 100개가 되었든 200개가 되었든 자립형 사립고들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그 안에서의 서열을 낳게 마련이다. 어차피 1등만 이 살아남는 체제에서는, 명문고에 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사교육비의 투자가 불가피하다.
결국 자율형 사립고를 통한 해법은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지기까지 자율형 사립학교들의 연쇄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들과 빈자들이 다니는 학교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며 사교육비는 눈덩이처럼 늘어날 것이다. 덧붙여 이제까지 간신히 유지해오던 우리의 공교육 체계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의 공약이 빵점인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목표로 그가 세우겠다는 50개의 마스터교와 150개의 농촌형 기숙공립학교 역시 허울에 불과하다. 현재 실업계 고등학교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대기업체 중심의 경제구조와 과도한 임금의 격차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대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내세우는 그가 조리사의 복장을 하고 ‘쇼’ 를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
또 서울 이외의 지방 학교들이, 특히 농촌의 학교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 역시 서울과 대도시 중심의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수도 이전을 결사적으로 가로막던 그가, 지방경제의 육성책으로 배를 산으로 보내는 ‘대운하’를 내세우는 그가 과연 농촌에 사람들이 돌아오게 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공교육이 살아날 것인가? 문제가 되는 지점을 정확히 짚지 않은 채 갖가지 상반된 정책들을 뒤섞어놓는 그가 빵점인 세 번째 이유이다.
네 번째로 그의 공약이 빵점인 이유는 충분한 준비없이는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입시제도의 변화를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주장하는 본고사와 고교등급제의 도입, 그리고 그가 유보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그 일부여서 마침내 도입될 기여입학제는 미국의 입시제도를 본 딴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기능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더구나 모두가 부러워 하는 최강국 미국의 제도인 점에서 그 제도를 연구해 볼 필요는 있다.
우리의 공교육은 미국과 다르다
그러나 이미 앞의 홍세화의 예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의 제도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의 입시제도는 미국의 대학만이 아니라 200여년동안 형성된 미국 교육제도의 일부이며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가,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미국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대학은 그저 대학이 아니다.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부자들의 사립학교 망이 존재하고, 이들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평가들이 이미 존재하며, 성공한 동문들의 기부와 기여입학제가 재원을 마련해 주고, 부자의 자제가 비싼 학비로 가난한 우등생의 학비를 대신하는, 그로 인해서 학교에서부터 만들어진 인간관계가 이어져 똑똑한 수재가 돈 많은 친구들의 돈을 불려주는데 머리를 빌려주는, 그 연쇄의 한 고리로 대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미국의 공교육은 사립학교 위주의 체계를 보완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이 모든 체계가 완성되면 그의 입시정책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능할까? 더구나 지난 50년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왔던 공교육의 전통이 미국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 입시제도의 추진은 결국에는 우리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재조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의 교육 공약이 빵점인 가장 큰 이유는 가장 나중에 추진해야 할 입시정책을 가장 먼저 언급하기 때문이며 표를 얻기 위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결국 한국이 미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늘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 미국은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국민의 10분의 1이 범법자가 되어 평생에 한 번은 교도소를 가고, 일자리가 없어진 자치단체장이 민영화된 교도소의 유치를 추진하는 곳이 또한 미국이다. 비버리 힐즈 옆에 슬럼가가 자리하며, ‘섹스 엔드 시티’의 뉴요커들이 ‘프리즌 브레이크’의 범법자들과 함께 사는 곳이다. 일상적인 살해의 위협이 대도시를 지배하는 그 곳이 또한 미국이다.
능력이 있어 미국인이 되겠다는 사람을 말릴 생각은 없다. 그곳에 가서 큰 뜻을 펴는 것 또한 가치있는 일일 것이므로. 하지만 나는 내 조국이 미국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대학 자율성의 의미는?
글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하버드대에 새로이 총장으로 부임하는 파우스트의 취임연설을 알리는 기사들을 읽었다.
무식의 소치인가 왜곡의 달인인가? 많은 기자들이 이 기사를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 7개 대학 총장들의 주장에 덧붙여 제시함으로써, 국가로부터 대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의 자율성인가? 그녀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수량으로 환산함으로써 인문학의 가치를 무시하는 신자유주의 대학정책으로부터의 자율성이다.
그녀는 대학에 시장의 가치를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하며, 대학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율의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전통적인 대학의 연구와 교육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을 단순히 정부의 개입에 대한 반발로, 이에 이어서 시장의 경쟁을 도입시키려는 이명박의 자율성으로 이어 붙이는 기자들의 능력에 감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한탄해야 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지난번에 쓴 글로 ‘파리유학생’이 되어버린 김정인입니다. 이제는 더 빼낼 시간이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이 글은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제까지 먹은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참고로 저는, 비록 아직도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지 못한 학생의 신분이지만, 10년이 훨씬 넘도록 프랑스 교육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처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홍세화 선생님의 ‘대학평준화’를 주장하는 칼럼을 읽고 난 후였는데 아무래도 바로잡을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미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께서 교육관련 공약을 발표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몇 마디는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입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6개의 글로 짧게 나누어 하루에 2편씩 사흘동안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다음은 각 편의 제목입니다.
1. 교육이 문제다?
2. 이해찬의 함께 켜져 있는 양쪽 깜박이
3. 홍세화의 프랑스식 모델, 대학평준화?
4. 이명박의 미국식 모델, 자율형 사립고?
5. 토론을 위한 전제들
6. 교육문제, 문국현이 정답이다
본문에서는 편의상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