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눈빛이었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295회

등록 2007.10.24 08:28수정 2007.10.2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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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하지만 준엄한 목소리였다. 하기야 자신이 나선들 성곤 같은 인물이 눈 하나 깜짝하겠는가? 그저 자식 된 도리로 나서본 것일 뿐.

“가만히 있거라.”


사부가 부친이라고 밝힌 후에도 추교학의 시선을 애써 피했던 중의가 애잔한 시선으로 추교학을 바라보았다. 추교학은 문득 저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순간에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분명 저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가끔 중의가 운중보에 들어와 자신을 바라볼 때 비치던 그 눈빛은 분명 아니었다. 사실 부친이라면서도 운중보 내에서는 어찌 그리 무덤덤하게, 어쩌면 냉정하게 자신을 대했던 것일까? 그렇게 하는 부친도 매우 힘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포가장(鮑家莊)…포대장주의 눈빛….’

자신의 부친인 것을… 한 때 환관의 자식이라 생각해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었건만…. 운중보에 입보한 이후 단 한번 북경에 갔을 때에 포가장에 들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의어른을 뵙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고모집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포가장이 변장한 중의의 가택임을 알 리 없었다.

바로 그 눈빛이었다. 단지 고모부라고 생각했던 그 포대장주의 눈빛. 추교학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순히 운중보의 보주의 후계를 잇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정작 부친이라고 생각했던 고모부와 고모부라 생각했던 부친은 더 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아닌 것을….’

자신은 그런 그릇이 되지 못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형제들을 물리치고 운중보를 차지하기에도 벅찬 것을… 그저 우슬 누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운중보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노력했을 뿐….


허나 그 말을 차마 지금 중의어른, 아니 부친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추교학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숨도 약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단지 자신이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진기를 급격하게 끌어올리자 무형독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말해보게. 어느 것을 복용해야 하는지.”

여전히 중의 뒤에서 여러 가지 해약이 든 녹피주머니 몇 개를 흔들면서 물었다. 중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곤이 이렇게까지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중의의 경계심은 온통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운중에게 가 있었고 그것이 또한 불찰이었다.

“내가 이 지경이 되어서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중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성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친구에 대해 자신이 이러는 것에 대해 자신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네만큼 더 잔인해 질 수 있네. 나를 더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지 말게.”

그것은 경고였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절대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태도여서 섬뜩한 느낌을 갖게 했다.

“….”

중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아무리 안다고 생각해도 정말 다 알 수 없는 존재다. 성곤이 자신에게 이럴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허나 이것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의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네. 무형독은 몸에 이상이 발생한 후 두 시진 이내에 해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들었네. 이미 수유 저 아이에게 무형독이 퍼진 현상이 나타난 지 벌써 한 시진이 넘었어.”

궁수유는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축 늘어져 의자에 몸을 싣고 있었는데 숨도 가빠지고 눈은 게슴츠레 풀려있어 본래의 미모는 어디 가고 볼썽사나와 보였다. 중의는 힐끗 궁수유를 보았다가 시선을 돌려 이미 굳어있는 손에 들려있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두 시진…아니 빠르면 한 시진 정도라면 추태감이 올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중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상만천 역시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해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터였다. 허나 두 시진은 지금 상황으로 보면 너무 긴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보여 왔던 모습과는 달리 자네의 치밀함에 아주 감탄하고 있네. 자네를 경계하지 못한 내 자신을 심하게 질책도 하고 있고. 자네가 가지고 있는 녹피주머니에 무형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약들이 들어있네.”

중의는 무슨 생각인지 순순히 시인을 했다. 성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무형독은 운중의 말대로 한 알의 해약으로 해독이 되는 것이 아니네. 무형독을 구성하고 있는 독성들이 서로 퍼지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복용을 해야만 해독을 할 수 있다네. 또한 자네 말대로 무형독에 중독되어 이상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두 시진 이내에는 반드시 복용해야 하지. 시기를 놓치면 설사 해독이 된다 해도 백치(白痴)가 된다거나 온 몸이 마비되어 버린다거나 하는 심각한 후유증이 따르게 된다네.”

무형독은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왜 그것이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키는데 일조를 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먹어야 할 해약이 어떤 것인가? 아, 물론 자네 아들 역시 증상이 나타났으니 저 아이에게 먹일 참이네.”

중의가 순순히 무형독에 대해 설명을 하자 성곤은 다소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으나 다그쳐 물었다. 이렇게 상대가 조금씩 물러나는 기색을 보일 때 다른 여지를 주지 않고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나는 이런 식으로 강요를 받으며 자네에게 말하고 싶지 않네.”

그 말에 성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자네는 끝까지 나를 잔인한 놈으로 만드는군. 무형독은 자네가 하독했고, 그것을 해독시켜야 하는 것도 자네의 의무야. 그것을 지금 자네는 무슨 은혜나 베풀어 해독시켜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제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서로 후회하지 않기로 하세.”

음성에 살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화를 좀처럼 내지 않는 성곤이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중의 역시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섬뜩한 느낌이었으나 아직 해약의 순서를 알지 못한 이상 자신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중의는 이것이 단지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일은 자신의 성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최악의 경우는 자신을 죽이더라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결국 죽게 되는 상황이다. 성곤이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절대…헉!”

중의는 냉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끝마치는 대신 비명을 질렀다. 허리에서 무시무시한 통증이 밀려들면서 그 고통은 척추를 타고 뒷머리까지 치솟아 올랐다.

“나는 더 잔인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네. 설사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말이지.”

성곤의 왼손은 중의의 허리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중의가 사용하던 소도(小刀)가 들려있었고, 그 소도는 손잡이만 남긴 채 중의의 허리에 박혀 있었다.

“헛!”
“헉!”

좌중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위협은 했지만 이렇게 아무런 경고 없이 성곤이 중의의 몸에 소도를 박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교학이 재차 벌떡 일어나려다가 고개를 숙이며 주저앉았다.
#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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