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이 아닌 '첨단동'이라고?

가리봉동 법정동명 공모 우수작은 <첨단동>

등록 2007.10.26 16:55수정 2007.10.2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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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개발을 앞둔 가리봉 시장.
재개발을 앞둔 가리봉 시장.나영준


지난 8월 22일 구로구청 홈페이지에는 서울 가리봉동 도시 브랜드 네이밍 및 법정동명 새 이름에 관한 공고가 걸렸다. 내용은 <과거 구로공단의 회색이미지와 낙후ㆍ영세한 가리봉동의 지역이미지를 근본적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법정동명>을 모집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가리봉동은 구로공단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60ㆍ70년대 성장위주의 정책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필요로 했고, 6만여 명의 여공이 가리봉동 일대 대규모 단지 안에서 근무했다. 당시 저임과 열악한 환경 아래 흘린 땀은 경제발전의 밀알이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각인 된 공장지대의 이미지는 가리봉동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것 또한 사실이다. 80년대 말 이후 공장과 여공들이 떠나며 재중교포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했고 영화나 코미디에서는 그런 가리봉동을 희화화 시켰다.

때문에 '가리봉동' 이라는 이름에 부담이나 불만을 느꼈던 일부 주민들이 생겨난 것도 사실. 이에 구로구청은 8월 27일부터 9월 16일까지 가리봉동의 새 이름을 공모했고, 지난 19일 결과를 발표했다.

첨단동? 정말 청담동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도시브랜드와 법정동명 수상작 발표
도시브랜드와 법정동명 수상작 발표삼우디앤엠

우선 법정명은 최우수상 없이 우수작으로 <첨단동>이 뽑혔다. 주관 개발사 홈페이지에는 뚜렷한 선정이유가 없다. 이어 도시브랜드 부문에는 이루시티(ERY CITY), 지유시티(GU CITY)등 다섯 개의 수상작이 발표됐다. 모든 수상작 뒷부분에 영문 ‘CITY’가 따라 붙는 것이 이채롭다.


첨단동, 아마도 뜻은 글자 그대로일 것이다. 그런데 발음이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미 광주광역시에 존재하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거주하는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역주민들은 민감한 문제라 그런지 실명 공개를 꺼렸다.

"그게 말이 돼요? 그렇잖아도 가리봉동 이라는 이름 가지고 놀림 당했는데, 이번엔 청담동 따라한다고 손가락질 받으려고요. 너무한다. 아무리 그래도 첨단동이 뭡니까. 그냥 남들이 뭐라 해도 가리봉동이 나은 것 같은데요."(○○고시원 총무)


물론 강력히 찬성하는 이도 있었다. 30여년 넘게 약국을 운영해 왔다는 김종배(가명)씨는 청담동하고 헷갈린다면서도 “아주 잘 됐다”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름 괜찮다.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 사실 가리봉동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어린 중고등학생들은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살았다. 진작 바뀌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반면 식당을 운영하는 김지영(가명)씨는 "우리만 좋다고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없어야 하지 않겠냐"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대치동이나 압구정동이라고 해라!

 과거 가리봉동의 쪽방촌 모습.
과거 가리봉동의 쪽방촌 모습.삼우디앤엠


 과거 여공들이 쪽방을 이용했다면, 지금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시원을 숙소로 쓴다.
과거 여공들이 쪽방을 이용했다면, 지금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시원을 숙소로 쓴다.나영준


이에 대해 구로구청의 담당자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확 눈길을 잡아끌만한, 지역에 어울리는 이름이 없었기에 최우수상을 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강남의 청담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정 후에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 부담스럽다. 꼭 그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법정동명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주민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아직 결정 된 것이 없다."

한편 수상작이 발표 된 개발사 홈페이지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중 닉네임 '황당해'라는 누리꾼은 이미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명을 수상작으로 발표하는 것은 해외토픽 감이라며 "차라리 대치동이나 압구정동이라고 하라"고 비꼬았다.

 모두 헐리고 몇 안 남은 과거 공장의 모습.
모두 헐리고 몇 안 남은 과거 공장의 모습.나영준


21일 점심시간 옛 가리봉역인 가산디지털단지 역에서 만난 직장인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 근무하는 김수형(34) 씨와 동료들은 "남의 동네일이라 함부로 말하기 무엇하다"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뭐라 그럴까. 힘들게 대학 간 애가 학교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느낌 같은데요. 첨단, 첨단 안 해도 이미 첨단단지로 가고 있잖아요. 근데 거기다 우리 동네 '첨단동'이다 해 봐요. 얼마나 웃겨요. 그거 사람들이 비웃어요."

"도시브랜드에는 왜 그렇게 '시티'가 많아요? 무슨 아파트 광고 같은데. 오히려 이런 게 유행에 더 뒤져요. 요즘엔 예쁜 한글도 많던데."

실제 1100개가 넘는 법정동명 공모작에는 가운데라는 뜻의 <가온동>이나, 첨단 신도시의 줄임말인 첨신동 등 뜻과 발음에서 뛰어난 작품들이 많았으나, 정작 수상에서는 제외되어 응모자들의 많은 불만을 사고 있는 형편이다.

자고나면 바뀌는 시대, 과연 첨단은 새로울까

 가리봉 지역 개발 후의 조감도.
가리봉 지역 개발 후의 조감도.삼우디앤엠


가리봉은 도시환경 정비사업으로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 낙후된 주거지역 28만5000㎡를 디지털 비즈니스 시티로 개발하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한때 굴뚝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가리봉은 지금 IT, 벤처산업, 고도기술 산업 등으로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지는 시점, 가리봉만이 옛 시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변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세상, 첨단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현대사회. 과연 이름마저 '첨단'으로 바꿔 단 가리봉동은 잿빛 추억을 털고 새롭게 비상할 수 있을까. 혹 그것은 그 옛날 가리봉 벌집에서 꿈을 키우던 여공들에게 물어야 할 몫은 아닐까.
#가리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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