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수사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한 탐정

[불멸의 탐정들 10] 손다이크 박사

등록 2007.10.29 14:23수정 2007.10.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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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백골>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중단편 8편이 실려있다.
<노래하는 백골>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중단편 8편이 실려있다.동서문화사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들을 읽다보면 셜록 홈즈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실제로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을 무대로 활동했고, 물적증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파이프 담배를 좋아하고, 뛰어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한눈에 꿰뚫어본다. 손다이크와 홈즈 모두 생물학과 화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셜록 홈즈의 곁에는 와트슨이 있었고, 손다이크 박사의 주변에는 저비스가 있다. 이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모두 와트슨과 저비스의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진행된다. 와트슨과 저비스는 모두 의사다.

셜록 홈즈를 만든 작가는 코난 도일이고, 손다이크 박사를 창조한 사람은 영국의 오스틴 프리맨이다. 코난 도일과 오스틴 프리맨은 모두 전직 의사였다.

또다른 사람이 떠오르기도 한다. 손다이크보다 약 100여년 후에 등장한 탐정 링컨 라임이다. 링컨 라임은 마치 손다이크 박사의 방법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손다이크 박사는 물적 증거를 조사하면서 현미경과 여러가지 렌즈 및 각종 분석도구를 사용한다. 이런 도구를 사용해서 용의자의 옷에 묻은 미량의 먼지를 분석한다. 혈액의 종류를 감별하고 조작된 지문을 파악해낸다.

셜록 홈즈, 링컨 라임과 유사한 면이 있던 탐정 손다이크


링컨 라임도 마찬가지다. 다만 링컨 라임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좀더 현대적인 것들이다. 링컨 라임은 증거를 분석하기 위해서 현미경은 물론이고 가스크로마토그래프, 질량분석기, 지문분석기 등을 총동원한다. 이런 분석의 과정을 거쳐서 범인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느 지역으로 도주하고 있는지 등을 순간적으로 파악해낸다.

링컨 라임은 미국 뉴욕의 구역과 지리적 특징을 모두 머리 속에 담고 있다. 손다이크 박사는 우체국 인명부를 뒤져가면서 런던의 어느 지역에 어떤 공장이 있는지, 어떤 임대건물이 있는지 등을 조사한다.


손다이크 박사와 링컨 라임의 또다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범인의 심리나 동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오직 자신이 갖고 있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 증거를 분석하는 것, 그리고 그 분석의 결과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법과학 스릴러의 대표작들로 꼽힌다. 그렇다면 이런 유사점으로 보았을 때,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들을 법과학 스릴러의 시초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손다이크 박사는 런던에 살고 있는 탐정이다. 국내에 번역소개된 작품들로만 보았을 때, 손다이크 박사에 관한 상세한 인상과 프로필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지 1912년 작품인 <오스카 브러트스키 사건>에서 손다이크의 외모가 간략하게 묘사된다. 손다이크 박사는 키가 크고 늠름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날카로운 얼굴에, 침착하고 단호한 인상의 사나이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한다. 어딜 가든지 간에 작은 트렁크를 하나 가지고 다닌다. 가로 세로 각각 30cm, 두께 10cm 쯤 되는 트렁크다. 손다이크 박사는 이 트렁크를 가리켜서 '휴대용 실험실'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는 증거분석에 필요한 각종 도구와 장비가 들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손다이크 박사가 향하는 장소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한 번씩 발생한다. 그때마다 손다이크 박사는 그 트렁크를 열어놓고 즉석에서 온갖 조사를 한다. 그러다보니까 트렁크 없이는 집을 나서지 않는 습관이 생긴 것도 당연할 것이다.

손다이크 박사가 새로운 조사에 착수할 때는, 언제나 그의 친구인 저비스에게 사건의 특질을 정리해서 이야기한다. 어떤 시체가 발견되면 그 사건이 단순사고인지, 자살인지 아니면 살인인지를 우선 파악해야 한다. 현장의 증인들과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이를 결정한다. 그리고 살인이라고 생각되면 그때부터 손다이크 박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수사방법으로 범인을 추적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증거물을 분석하는 손다이크

그 수사방법이란 것은 대부분 현장에 남겨진 미량의 증거물을 분석하는 것이다. 열차궤도에 떨어진 작은 유리조각들을 현미경으로 조사하고, 외투에 묻은 먼지를 분석해서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외투인가를 알아낸다. 시체의 입안을 조사해서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알아내기도 한다. 손다이크 박사의 명성때문에 많은 의뢰인들이 그를 찾아온다. 그중에는 런던경시청의 경찰들도 있다.

경찰들은 모두 손다이크 박사의 명성을 알고 있지만, 그의 수사방법에는 의문을 나타낸다. 어떤 경찰은 손다이크 박사에게 '저녁에 먹은 음식을 조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손다이크 박사는 경찰견의 추적을 바탕으로 용의자를 검거한 경찰에게 '한심하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손다이크를 창조한 작가 오스틴 프리맨은 당시로서는 무척 참신한 과학적 수사방식을 작품 속에 도입한 것이다.

오스틴 프리맨이 남긴 업적은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도치서술(倒置敍述)의 기법을 작품에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도치서술이란 것은 글자 그대로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서술순서를 뒤집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사용한 작품들은 범인이 범죄를 구상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범인은 범죄를 구상하고 치밀하게 계획하며, 갈등 끝에 결국 실행하고 만다. 즉 도치서술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작품을 읽기 시작하게 된다. 이런 작품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도치서술의 특징은 '범인이 누구냐?'라는 점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범인은 어떻게 완전범죄를 구상할까. 범인은 어떤 증거물들을 현장에 남겨둘까. 탐정은 어떻게 그 범죄의 허점을 간파해낼까. 이런 점들이 도치서술을 사용한 작품의 매력이다. 손다이크 박사는 사람보다도 사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탐정이다. 그랬던 만큼 그가 등장하는 작품들의 상당수가 도치서술의 방식을 택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도치서술의 기법을 활용한 작가 오스틴 프리맨

이런 두 가지 특징, 증거물에 대한 과학적분석과 도치서술의 특징이 잘 담겨진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스카 브러트스키 사건> <어느 퇴락한 신사의 로맨스>가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범인이 범죄를 구상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사건이 발생하고, 손다이크 박사의 분석을 통해서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끝나게 된다.

작품에서 손다이크 박사는 과학수사의 방법을 납득하지 못하는 경찰들을 주위에 두고 완벽한 분석과 그에 따른 추론을 펼쳐보인다. 이 추론이 사실로 확인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조해하는 경찰에게 손다이크 박사는 '그저 시험삼아 해보자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손다이크 박사의 '그저 시험삼아'라는 표현이 확신에 가깝다는 것을 경찰들도 알고 있다.

손다이크 박사가 사건을 수사할 때는 항상 그의 친구인 저비스가 함께 한다. 저비스는 꼼꼼하게 현장을 관찰하고 손다이크를 도와주면서 한편으로는 수사과정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손다이크 박사의 연구조수인 폴튼이 도와주기도 한다. 폴튼은 <어느 퇴락한 신사의 로맨스>에서 자신이 발명한 '먼지추출기'라는 장비를 가지고 증거분석을 돕는다.

과학수사라고 하는 독특한 방식과 장비들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손다이크가 항상 강조하는 범죄수사의 근본법칙이 더욱 중요하다. 손다이크는 사건에 관계된 일은 아무리 작은 사실이라도 선입견 없이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사건과 관계없어 보이는 부분이라도 정성껏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당시의 경찰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손다이크는 경찰간부에게 '먼지를 보지 못하셨더군요'라고 말해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런 근본법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다이크의 방법은 과학수사로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장에 남겨진 모든 것을 검토하고 연구하려면 무엇보다도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식과 장비, 그에따른 추론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손다이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뚝심있게 밀고나가는 배짱도 있던 인물이다. 그런만큼 경찰의 존경을 받으며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과학수사가 많이 보편화 되어 있다. 하지만 손다이크가 활약하던 100여년 전에는 무척이나 낯설고 어려운, 때로는 귀찮은 수사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다이크는 그런 수사방식을 개척해낸 탐정이다. 탐정의 계보에서도, 과학수사의 역사 속에서도 손다이크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인물이다.

노래하는 백골

오스틴 프리맨 지음, 김종휘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4


#추리소설 #손다이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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