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이 말하는 노년이 진짜다

책 속의 노년(90) : <친절한 복희씨>

등록 2007.11.05 17:07수정 2007.11.06 13:52
0
원고료로 응원
a <친절한 복희씨> 표지

<친절한 복희씨> 표지 ⓒ 문학과 지성사

▲ <친절한 복희씨> 표지 ⓒ 문학과 지성사
이제는 누구나, 어디서나 다 노년을 이야기한다. 영화도, 연극도, 소설도, 드라마도 자연스럽게 노년을 다루고 어떤 때는 그것을 앞에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예전에는 노년을 다루기만 해도 그저 고마워서 열심히 보고 읽고, 글을 쓰거나 방송을 했던 때도 있었다.


고령화 시대, 고령화 사회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고,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많이 들어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게 되자 노년 이야기 역시 우리들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반드시 자신이 경험을 해야만 이야기를 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닌데, 유난히 노년만은 경험이 그 어떤 지식보다 앞서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노년 전문가'로 불리기도 하는 나 역시 어르신들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아무리 잘난 체해도 노년은 내 경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친절한 복희씨>는 올해 76세의 작가(박완서)가 쓴 노년 이야기들이다. 한 편 한 편 어찌나 적확한 노년의 삶과 일상을 담아놓았는지, 노년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르신들을 만나는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년의 사랑과 그리움과 연애와 결혼을 담은 <그리움을 위하여>는 지난 2001년 10월 26일자 기사(책 속의 노년 9)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빼기로 하고, <그 남자네 집>의 주인공은 지나간 시절 '그 남자'와의 추억을 밟아나간다. 그 때로부터 멀리와 있는 지금, 그런 시절이 정말 있기나 했던가 묻는 노년의 뒤돌아봄은 한없이 애틋하다. 그러나 젊음을 바라보는 노년의 눈은 부러움만도 아닌, 질투만도 아닌, 복잡다단한 감정을 담고 있어 오히려 절절하다.


<마흔 아홉 살>은 한 마디로 '세월이 빠져나간 자리의 허망함'을 그린 소설이다. 내 나이가 마흔 여덟이어서일까...이렇게 인생이 저물어 노년으로 옮아가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때가 요즘 많아서일까...눈에 콩깍지가 덮이는, 불꽃이 이는 사랑이 더는 내 것이 아닐 거라는 씁쓸한 자각 때문일까...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함께 헛헛함으로 읽어 나갔다.


<후남아, 밥 먹어라>는 결혼해 미국에서 사는 주인공과 이 땅에 남아 치매에 걸린 어머니 이야기이다. 그저 밥밖에 모르는 어머니, 치매에 걸리고서도 딸자식 밥 먹일 일을 기억해내고 젊고 씩씩한 목소리로 "후남아, 밥 먹어라!" 외치는 어머니. 그 안에 우리들 숨이 있고, 삶이 있다.


<촛불 밝힌 식탁>은 어르신들과 함께 읽고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연극으로 만들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자식이 사는 거리가 어느 정도쯤인 것이 좋을까에 대한, 이보다 저 정확한 통찰이 없으며 정직한 토로가 없다. 자식네 집 창문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살면서 식탁에 촛불을 밝힐 수밖에 없는 노년의 정황이 가슴 아프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분명해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대범한 밥상>. 회복 불가능한 병 앞에서 친구를 찾아간 주인공. 오래 전 생때같은 딸 부부을 잃고 손자 손녀를 위해 살아야 했던 사연-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니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던 사연을 하나씩 알아가노라니 우리네 삶의 보이지 않는 갈피가 참으로 엄숙하게 다가온다.

 

<친절한 복희씨>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다'. 다만 그렇게 된 사연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산 세월의 숨겨진 아픔도 다른 사람은 꿈에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다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누가 알아주랴. 세월의 무게는 그래서 때론 자신의 목숨을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버겁기도 하다.


<그래도 해피 엔드>가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서울 근교로 이사해 사는 주인공이 동창 모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서 겪는 하루가 경쾌한 듯하면서도 꼬여가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아한 노년 생활일 것 같은 전원생활이 품고 있는 생각지 못한 함정들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것 같아서이다.


노년의 삶이 어찌 다 편안하고 우아하고 멋질 수 있을까. 그러나 또 어찌 다 슬프고 칙칙하고 보잘 것 없기만 할 것인가. 젊어서의 생이 그 모두를 품고 있는 것 같이, 나이 들어서의 삶 또한 그 모두를 안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뿐. 젊음의 하루 하루가 모여 노년이 된다는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노년 작가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을 관찰하고, 많이 만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럼, 나는 어쩌나. 나이 듦과 늙음과 노년을 잘 아는 체하며 돌아다니는 나는 도대체 어디에 가서 잘난 체 하지?


이 기회에 잘난 체는 접고 노년의 작가가 쓴 노년 소설을 어르신들과 나누면서 남의 이야기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그것이 노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노년 전문가' 노릇을 하고 있는 나의 역할일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친절한 복희씨>(박완서 소설집 / 문학과 지성사, 2007)

2007.11.05 17:07ⓒ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친절한 복희씨>(박완서 소설집 / 문학과 지성사, 2007)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7


#노인 #노년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노년 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5. 5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