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 나물 임자는 간데 없는데 죽순만 남아...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이었던 고 김현준 선생을 추억하며

등록 2007.11.07 17:29수정 2007.11.0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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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앞길을 지나가는 참에 잠깐 들르겠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냉장고로 뛰어갔다. 오랜만에 그것도 밥 때쯤 당도할 텐데 반찬이 없더라도 밥 한 공기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무엇을 해 먹일까? 크고 작은 비닐 덩어리에 쌓인 반찬재료들이 들쑥날쑥 쌓여 있는 것을 들쑤시다 아뿔싸 그 중 동글동글한 비닐 하나가 떨어져 발등을 강타했다. 어찌나 아픈지 뼈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눈물 쏙 빼고 나서 이 ‘웬수 덩어리’가 무엇인가 살펴봤더니 죽순 삶아 뭉쳐놓은 것이 아닌가.

 

a  땡땡 언 죽순을 냉동실에서 꺼내 찬물 속에 넣고 살짝 데쳤습니다.

땡땡 언 죽순을 냉동실에서 꺼내 찬물 속에 넣고 살짝 데쳤습니다. ⓒ 조명자

땡땡 언 죽순을 냉동실에서 꺼내 찬물 속에 넣고 살짝 데쳤습니다. ⓒ 조명자

 

아픈 건 아픈 거고 잘됐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5~6월 잠깐 나는 죽순 나물을 지금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이 계절엔 별식 중에 별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돌덩어리처럼 꽁꽁 언 죽순 나물을 냄비에 담고 그 위에 찬물을 부어 그대로 데쳤다.

 

죽순 나물은 찬물부터 시작해야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난다는 말씀을 옆집 할머니께 들었던 터였다.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구어놓으니 어제 삶은 것처럼 탱탱한 죽순이 그대로 살아 오른다.

 

대나무골에서만 흔히 맛볼 수 있는 죽순 나물. 죽순 요리 종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우선 그대로 꼭 짜서 들기름이나 식용유를 조금 붓고 살짝 볶아도 담백한 그 맛이 아주 일품이다. 죽순 나물을 볶을 땐 특별히 파, 마늘은 넣지 않고 소금, 참기름 그리고 깨소금으로 맛을 내는 이유도 진한 양념 맛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a  해물은 없지만 죽순 하나만으로 초무침을 했습니다. 쫄깃쫄깃한 죽순나물 감촉에 새콤달콤한 초무침. 그럴 듯 하지요~

해물은 없지만 죽순 하나만으로 초무침을 했습니다. 쫄깃쫄깃한 죽순나물 감촉에 새콤달콤한 초무침. 그럴 듯 하지요~ ⓒ 조명자

해물은 없지만 죽순 하나만으로 초무침을 했습니다. 쫄깃쫄깃한 죽순나물 감촉에 새콤달콤한 초무침. 그럴 듯 하지요~ ⓒ 조명자

 

다음은 죽순 초무침. 죽순에다 여러 가지 해산물을 함께 섞어 초무침을 해도 아주 맛있는 요리가 죽순 초무침이다. 맛살, 바지락 살 등의 조개류 또는 오징어, 주꾸미 등 초무침에 적당한 해산물이면 아무것이나 좋다. 초고추장, 매운 풋고추 그리고 파 마늘 참깨, 참기름. 갖은 양념을 넣고 살짝 무치면 색깔 고운 초무침이 당장에 입맛을 돌게 한다.

 

그 외에 육개장에 넣어도 좋고 해물 탕, 된장국, 튀김 요리 어떤 요리에나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죽순 요리지만 그래도 죽순 요리의 대표주자는 역시 죽순 초무침 아닐까. 볶음을 할까? 초무침을 할까 고민하다 초무침을 하기로 했다. 초무침에 들어갈 해산물은 없지만 죽순 하나만 무쳐도 새콤달콤한 그 맛이 다른 일품요리 못잖게 맛있기 때문이다.

 

죽순을 보니 두 달 전에 세상을 뜬 김현준 선생 생각이 간절하다. 냉장고에 땡땡 얼려 두 봉지에 나눠 둔 이 죽순 임자도 사실은 김현준 선생이었는데. 죽순을 주고 싶은 임자는 간 데가 없고 임자 없는 죽순 두 봉지만 남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큰 키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형수~” 하고 우리 집 대문을 들어서던 모습. 형수 집처럼 푸근한 시골집에서 요양을 하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그를 위해 한때 빈집도 물색해 봤지만 아픈 사람이 편히 지낼 만큼 성성한 빈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때로는 전남 곡성 산골짝에, 때로는 지리산 마천골 어느 농가주택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수도승처럼 잔잔하면서도 심상한 표정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그였는데, 6년 전에 느닷없이 찾아온 대장암이 간암과 폐암으로 재발에 재발.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 한 사람을 우리 곁에서 빼앗아가고 말았다.

 

a  제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김현준선생님의 생전 모습

제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김현준선생님의 생전 모습 ⓒ 전교조 '김현준선생사진'에서

제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김현준선생님의 생전 모습 ⓒ 전교조 '김현준선생사진'에서

 

남편의 후배였던 김현준 선생을 처음 본 것은 전교조가 조직된 얼마 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83년에 영어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는 전교조의 모태가 되었던 지역의 교사모임은 물론 87년 교육민주화선언과 4·13호헌철폐 교사선언에도 참여했고 그 뒤 적극적으로 전개되던 조직운동, 즉 서울교사협의회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교육자였다.

 

그 뒤 전교조가 출범한 뒤 전교조 서울지부 부지부장으로 선출되어 다른 교사들과 함께 교육운동을 펼치다 89년도에 해직, 기나긴 가시밭길을 가게 된다. 그를 봤을 땐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봐왔던 투쟁전선의 투사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느낌부터 들었던 기억이 난다.

 

뭐랄까? 딱딱함보다는 부드러움이 더 많았던 모습. 씩씩하고 활달한 모습에서 다급하고 초조한 투사보다는 왠지 모를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던 해직 교사. 상황과 상관없이 성품이 참으로 느긋해 보여 생활이 여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 저처럼 느긋한 건 아닐까 추측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전혀 ‘아니올씨다’였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부모님 부양은 물론 형제들을 아우르는 책임이 그에게 있었다. 달마다 월급을 타 와야 생계가 가능한 집안이었지만 다행히 부인도 교사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계는 꾸려갈 수 있었지만 셋집 신세는 도저히 면할 길이 없는 그러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번 만나고 김현준 선생을 자주 보게 된 것은 6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암 환자 선배로서 김현준 선생과 공유할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투병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고초들. 음식과 운동 그리고 요양환경 어느 것 한 가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고향 땅 남도에서 잠깐 요양을 할 때 두어 번 들른 우리 집. 김현준 선생은 특히 죽순 나물을 아주 좋아했다. 어렸을 땐 자주 먹었던 음식일지라도 객지 그것도 서울에선 웬만해선 구하기 어려운 나물이 죽순 나물이다.

 

볶아도 줘 보고 초무침을 해서 주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던지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그 먹는 모습이 좋아 죽순 얼려놓은 것을 몇 덩이 줬더니 서울 가서도 아주 잘 먹었다는 인사를 받았다.

 

해마다 죽순 철이 되면 김현준 선생 생각부터 났다. 공기 좋은 산골짝에서 요양할 때는 특별히 챙겨 줄 필요가 없었다. 요양하는 그 마을에도 아주 흔한 게 대나무밭이기 때문이다.

 

대장암 수술 이후엔 물론 교실로 돌아갔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대장암 수술 받은 몇 년 후 간암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간암 선고를 받은 줄 모르고 선암사 관음기도 때 만난 김 선생. 얼굴이 너무 흙빛이기에 내가 걱정을 했더니 그제야 재발을 했다고 흡사 남의 이야기처럼 꺼내놓는 것이었다.

 

“형수, 간에 암 덩어리가 생겼다네. 의사가 빨리 수술을 하자는 걸 그냥 선암사로 내려와 버렸소. 간에 재발이 됐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그 참, 지랄 같드만….”

 

마치 생사여탈에 초연해 버린 듯. 죽을까봐 동동거렸던 내 모습이 떠올라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놀라웠다. 재발은 생명을 담보할 수 없다는 통보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간암 수술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교사로서,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으로서 직무를 다 하며 활동과 휴직을 번갈아했지만 김현준 선생은 환자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에 저래도 되는가 조마조마했던 가슴이 어제 같다.

 

마지막, 폐암으로 전이돼 투병생활을 하던 모습.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가뜩이나 긴 목이 더 말라 마치 황새 모가지처럼 가늘었지. 힘은 없어도 눈빛은 형형해 “나, 괜찮소. 걱정 마시오. 허허허~” 웃던 모습. 통증이 온 몸을 덮쳐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 가슴 아플까봐 내색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이승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을 때 가까운 친구에게 가슴 아픈 회한을 말하더란다.

 

“아내한테 너무 미안해. 전교조 활동 때는 해직이 돼서 집안 살림을 몽땅 떠맡기고 복직이 되어 그 짐을 덜어줄 만하니깐 또 병이 들어 아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정말 가족한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가족들한테 남겨줄 수 있는 게 연금밖에 없는데. 연금받을 수 있는 기간 동안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20년 근속을 해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데, 얼마나 더 해야 20년을 채우느냐고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암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지. 차라리 의식을 앗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죽을 때까지 정신 말똥말똥하게 하며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게 몹쓸 암 덩어리였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찾았던 지인에게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한두 달 끌까봐 걱정이다”라고 말하더란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니 자신의 통증이 가족까지 힘들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 뼈아픔을 에둘러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현준 선생 49제가 11월 3일이었단다. 학생의 날, 광주 학생 항일운동 기념탑이 세워진 모교(광주제일고) 교정에서 나라와 민족애를 가슴에 품고 자란 그 학생 김현준. 이승에 떠돌던 영혼이 비로소 극락으로 귀천한다는 49일 그날이 학생의 날이었다.

 

선배들의 항일운동 정신을 민주화 운동 그리고 참교육운동으로 계승한 김현준 선생. 잘 가시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세상에서 이 땅의 근심 모두 잊고 편안히 가시라. 편안히 쉬시라.

#죽순나물 #고 김현준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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