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에서 시니컬한 홍국영으로 분한 한상진.
MBC
"자네 같은 사람이 겨우 그만한 노력으로 무과에 입격할 수 있는 줄 아는가? 무과에 입격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해 (중략) 피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대수(이종수) 고개가 떨어지려는데, 단기속성 과외방 선생 나으리가 말했다.
"그건 다……. 개소리네."깜짝 놀라 쳐다보는 대수에게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병법이란 어차피 상대를 속이는 거라고 손자도 하지 않았나? 어디 적당히 속이고 눙쳐서 입격할 방도를 찾게."대수는 황당했다. 양반이 어찌 그리 말하냐 따지자 그 양반이 또 말했다.
"양반이니 그렇지. 나라에서 제일 속임수에 능한 게 누군가? 바로 나 같은 도포짜리들이네." 홍국영은 그렇게 등장했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뭇사람들을 속이고 눙쳐서, 위태한 세손 저하(이서진) 임금 만들기에 맹활약중인 홍국영 아니 한상진을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만났다. 갓 벗고 수염 떼고 도포자락 벗은 그는 딴 사람 같았다. 책사 홍국영보다 신수 훤한 펀드매니저로 보였다.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을 보필하던 ‘깍두기’ 머리 의국장도 아니었다.
홍국영, 다른 사극과 다르게 다르게
"홍국영이란 역할이야. 노력을 많이 해야 해. 부족하니까 열심히 해야 하고."
이병훈 감독이 말했다. 지난 6월이었다. 그는 아무도 몰래 홍국영에 뽑혔다. 처음엔 본인도 몰랐다. 김근홍 감독, 이병훈 감독, 그리고 주요 제작진까지 3차 관문을 통과한 결과였다. 살아온 이야기도 했고, <대장금> <허준>의 주인공 남자 역할도 해보인 결과였다.
배우 생활 7년째지만, 아직 무명인 그에겐 파격이었다. 어쩌면 '발탁'이었다. 홍국영이 누군가? 세손 편에 서서, 오르내리는 극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책사'였다. 그는 무술을 배우고 승마를 배웠다. 영조와 정조시대 책을 읽었다. 홍국영에 대한 만화책도 봤다. 하지만 이전에 홍국영을 그린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이병훈 감독 엄명이었다.
"홍국영이 나온 드라마, 절대 보지 마라. 그거 답습해서 비스무리하게 만들거나 하지 마라. 네 것을 해라."
드디어 대본 연습 시간이 돌아왔다. 10회였다. 홍국영이 첫 등장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무지 잘했다'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혼이 났다.
"대본 딱 들어갔는데, 한 줄을 못 넘기는 거예요. 한 단어 읽으면 감독님이 '그게 아니지.' 아냐. 그게 아냐. (말투가?) 네. 말투가. 시니컬해야 하는데 전 너무 사극처럼 만들어왔던 거죠. 누군가를 따라하는 느낌이 막 드신데요. 왜 그렇게 만들어왔냐고, 네 것 하라고, 네 평소하던 대로 해봐!"
대본 연습이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떨렸다. 하지만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홍국영은 어려운 말도 유창하게 좔좔좔 읊어야 했다. 홍국영은 똑똑한 사람, 천재였으니까. 그렇다고 감정 없이 줄줄 읊어서도 안 됐다. 템포를 살려야 했다. 그걸 찾아야 했다. 너무 힘들지만 찾아야 했다. 대본을 정말 많이 봐야 했다. 봐도 봐도 부족했다. 해도 해도 혼이 났다. 발음 때문에, 너무 느려서, 너무 빨라서……. 힘들었다. 대본만 나오면 입에 펜을 물고 대사를 연습했다. 또 감독은 그에게 전체를 보라고 했다. 그러다 슬슬 코드가 맞아가는 게 보였다. 많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하얀 거탑> 할 때는 수술도구까지 다 외웠어요. 수술실 들어가서 막 공부하고요. 똑같이 해야 된다구……. 감독님이, '야. 너네, 의사야. 한상진이 아니라 이제 의사가 된 거야. 의사들이 봤을 때 니네가 진짜 의사 같아야 우리 대화가 진짜 대화가 되는 거지. 안 그럼 우리 것은 흉내 내기야.'
가끔 저도……. 이럴 때도 있죠. '내가 왜?' 그런데 방송 나오는 거 보니, 딱 알겠더라구요. 감독님 생각이 맞았구나. 내가 착오가 있었구나. 아! 시니컬하게 표현하란 게 저런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