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세계 최악 감시사회 꿈꾸나

[해외리포트] 테러 방지 명목 '요새화' 전략 논란... "사회적 자살" 비판도

등록 2007.11.20 10:34수정 2007.11.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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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든 브라운 총리가 발표한 '영국의 요새화' 전략을 보도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

고든 브라운 총리가 발표한 '영국의 요새화' 전략을 보도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사. ⓒ <데일리 텔레그래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감시가 심한 국가로 꼽힌다. 주요 시설뿐 아니라 거리, 기차역 등 곳곳에 설치된 CCTV만 420만대에 달한다. 영국 국민 15명당 1개꼴로 CCTV가 설치된 셈이다. 아주 미세한 소리도 녹음할 수 있는 '특수 카메라'도 적지 않아 심지어는 거리에서의 폭언, 사고, 화재 등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영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더 심한 감시 국가로 빠져들고 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14일 발표한 '영국의 요새화(Fortress Britain)' 전략은 그 결정판. 단순히 주요 건물이나 시설에 국한하지 않고 학교, 병원, 레스토랑, 스포츠 센터 등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새로 적용될 이 전략의 골자는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상시적인 감시다.

특히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기소 없이 합법적으로 구금할 수 있는 기간을 현재 최대 28일에서 무려 58일로 늘리는 방안과 외국인을 차별하는 요소 등 반인권적인 내용도 적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18일 "영국이 점차 사회적 자살을 감행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a  테러 예방 목적으로 영국 정부에서 여행객에 대한 조사와 감시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 BBC > 기사.

테러 예방 목적으로 영국 정부에서 여행객에 대한 조사와 감시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 BBC > 기사. ⓒ BBC


브라운 '영국을 요새화하라'... 곳곳에 주차금지 구역, 역에서도 소지품 검사

브라운 총리가 이번 영국 요새화 전략에서 밝힌 새로운 보안 조치들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칠 만큼 그 범위가 매우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전략은 테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조치에서 시작한다. 공항, 기차역, 항구 등 테러 가능성이 있는 주요 시설물에 차량 주차금지 구역을 임의로 설정하고, 폭발에 대비한 가건물 등을 새로 세우도록 하고 있다. 브라운 총리는 지난 6월 글라스고 공항에서 발생한 것처럼 차량이 공항 정문 등에 돌진하는 자살테러 형식의 테러를 막기 위해 이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것이 "견고한 물리적 장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물리적 장벽은 일반 시민이 이용하는 축구 경기장, 극장, 레스토랑, 쇼핑센터, 호텔, 스포츠센터, 병원, 학교, 교회 등 대중적인 시설 등에도 새로 적용될 전망이다. 또 앞으로 새로 짓는 쇼핑센터의 유리 등에는 테러에도 잘 견딜 수 있는 건축자재와 유리를 사용하는 등의 새로운 건축규제도 생길 예정이다.


런던에 있는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팀의 에미리트 경기장은 차량들을 제한적으로 접근시키고 대피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이 같은 물리적 장벽의 대표적 건물로 꼽힌다.

a  런던 북부에 있는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팀의 에미리트 경기장.

런던 북부에 있는 프리미어리그 아스날 팀의 에미리트 경기장. ⓒ 아스날 홈페이지


외국인, 53가지 개인정보에 생체정보까지

물리적 장벽뿐 아니라 일상적 감시도 한층 강화된다. 영국 정부는 테러 감시 전문 요원을 수천 명 증원하는 동시에 시민 동원을 통한 상시적인 감시를 강조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감시, 적발하기 위한 안내문(Guidance)을 시민이 이용하는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보낼 계획이다. <가디언>은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과 관련된 회사를 대상으로 테러 발생에 대비한 비상출구 및 대피소를 확보하고, 일상적 감시를 위해 CCTV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이 실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차역에서도 공항에서 수속을 밟을 때처럼 신체와 소지품을 검사하는 등의 조치가 공식적으로 허용될 방침이다.

영국 정부는 특히 학교, 대학, 모스크 등의 젊은 학생들이 테러리스트와 연계되는 것을 상당히 우려하는 기색이다. 영국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교장 선생님이 테러 방지를 위한 모임을 의무적으로 결성하고 학생들에게 별도의 교육을 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을 출입하는 외국인에 대한 감시도 한층 강화될 계획이다. 영국에 드나드는 여행객들은 앞으로 이메일, 전화번호, 신용카드 정보, 여행계획 등 최대 53가지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또 내년 3월부터 영국에 오려는 사람은 지문과 홍채 인식 등 생체정보를 제공하는 생체 정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아울러 영국 정보는 테러가 의심되는 사람의 경우 어느 곳에 있든 강제송환을 할 수 있도록 주요 국가들과 외교 협약을 추진하고 있다.

무기소 구금기간 58일? 지금도 미국의 14배인데

영국 정부는 이 전략을 반영해 기존의 '테러척결법안(anti-terror legislation)'을 수정,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이다. 노동당의 이러한 '요새화' 방안의 상당 부분에 대해 보수당은 긍정적인 반응이다. 데이빗 캐머런(David Cameron) 보수당수는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담겨) 있다"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방안이 모두 지지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 크게 논란을 일으키는 내용은 기소하지 않고도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구금할 수 있는 기간을 현행 최대 28일에서 최대 58일로 늘리는 방안이다. 유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구금하고 조사할 수 있는 기간을 지금보다 30일이나 더 늘리자는 것. 영국 정부는 "테러의 속성상 복잡한 국제 연결망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풀기 어려운 컴퓨터 파일을 해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러한 조치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a  각 나라의 무(無)기소 강제 구금 기간을 비교한 <가디언>의 그래픽 자료.

각 나라의 무(無)기소 강제 구금 기간을 비교한 <가디언>의 그래픽 자료. ⓒ <가디언>

하지만 이는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한 행위로 무슬림 등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삼을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

영국은 기소 없이 구금할 수 있는 기간이 이미 28일로 세계 주요 국가들 가운데 최장국가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심지어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한 미국도 그 기간이 2일에 불과하고 2위인 호주가 12일을 기록하고 있을 뿐, 어느 국가도 영국처럼 장기간 감금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를 58일까지 늘리려고 하니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다.

보수당의 데이빗 데이비스 의원은 "정부는 우리가 28일 이상으로 (그 기간을) 늘려야 할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반대 방침을 분명히 했다. 자유민주당의 닉 크레그 대변인도 "브라운 총리가 이 같은 조치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증거도 없이 왜 이 정책을 추진하려는지 모르겠다"고 비난했다.

유명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젠킨스는 더 이상 "국가 안보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제안한 것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다"며 "영국이 경찰국가(police state)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다고 지적했다.

집권당인 노동당 내부에서조차 이 조치에 대한 반대 여론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 이 법률을 개정하는 작업은 적지 않은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의 그늘과 경찰국가 영국

영국 정부가 테러 위협에 얼마나 민감하고, 이에 긴장하고 있는지를 이번 '요새화 전략'에서 엿볼 수 있다. 런던 테러 이후 올해에도 몇 건의 테러 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영국 정부는 정보기관인 MI5를 통해 테러 감시의 고삐를 바짝 죄었고, 새 기구(UK Border Agency)를 통해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에 대한 사찰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그러나 사실 이번 요새화 전략과 유사한 주장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때도 나왔다. 2005년 당시 블레어 총리는 "영국에는 알려진 것만 1500명의 테러리스트가 있고, 이들을 근절하기 위해서 최대 90일의 무(無)기소 구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브라운 총리는 이 같은 블레어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이 극심한 감시 사회로 치닫자, 영국 언론들은 합법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주간 <옵저버>에서는 지난달 28일 ▲ 추적이 불가능한 휴대전화 구입하기 ▲ 친구와 자기들만의 언어로 편지쓰기 ▲컴퓨터 사용을 추적할 수 없도록 하는 소프트웨어 설치하기 ▲ CCTV에서 찍혀도 알아보지 못하게 평상시에 후드티 입기 등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왜 영국을 향해 총을 겨누고 테러를 계획하는 이들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서 영국이 한 역할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칼'만을 앞세우는 영국의 안보정책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서로 의심하고 감시하는 사회를 강제할수록 영국인들은 자유를 스스로 잃어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a  브라운 총리의 요새화 전략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고 보도한 <타임스> 기사.

브라운 총리의 요새화 전략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고 보도한 <타임스> 기사. ⓒ <타임스>


#영국 요새화 #테러와의 전쟁 #경찰국가 #고든 브라운 #토니 블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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