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탑가에선 독립군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주노동자, 재중동포, 새터민들의 좌충우돌 한국생활기 11] 심양시내 왕선생님 댁

등록 2007.11.22 09:56수정 2007.11.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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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을 지나 우리가 찾아간 곳은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시. 먼저 동북3성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 재중동포들이 주로 거주하는 중국 동북부의 3개의 성으로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지칭한다. 청대에 주로 동북3성으로 불리었고, 일본에 의해 만주로 불리기도 했다.


한때는 우리나라 영토이기도 했던 이 지역은 만주족 출신의 누르하치가 주위 부족을 모아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조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 무렵이 동북지방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동북3성 지방은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하는 한국여행객들로 아직도 늘 붐빈다. 요녕성의 성도는 심양, 길림성의 성도는 장춘, 흑룡강성의 성도는 하얼빈이다.

a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시의 한 풍경 천진시보다 비교적 건물은 더 깨끗했고 공기는 더 맑았다.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시의 한 풍경 천진시보다 비교적 건물은 더 깨끗했고 공기는 더 맑았다. ⓒ 차승만


a 심양 시내의 이른 아침 풍경 할아버지들이 새장을 들고나와 새들을 산책시키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공원에 나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고 있다.

심양 시내의 이른 아침 풍경 할아버지들이 새장을 들고나와 새들을 산책시키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공원에 나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고 있다. ⓒ 차승만


a 산책나온 새들 비록 새장 속에 갇혀있지만, 할아버지들이 데리고 나온 새장 속의 새들.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둘 때 새들은 맑은 공기를 마신다.

산책나온 새들 비록 새장 속에 갇혀있지만, 할아버지들이 데리고 나온 새장 속의 새들.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둘 때 새들은 맑은 공기를 마신다. ⓒ 차승만


열차가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37분. 왕매옥(가명)선생님이 플랫폼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놀란 것은 왕선생님과 함께 원귀비선생님이 나와계셨기 때문이었다.

원선생님은 길림성이 고향인 한족 분이시다. 한국에서 3년여 동안 부인과 함께 미등록노동자 신분으로 반월공단 나염 공장에 꾸준히 다닌 덕에 돈을 꽤 벌었다. 부인은 아직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원선생님 역시 우리 센터의 핵심 구성원으로 제주도 여행까지 함께 다녀왔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것을 늘 자랑처럼 생각하고 계시다.

함께 간 일행들 중 여성팀은 왕선생님 댁으로 갔고, 남성팀은 원선생님과 함께 여관에서 잠을 청했다. 여관은 중국돈 60원짜리로, 일명 도미토리라고 부르는 여관이다. 녹슬은 철제침대 위에 모포를 깔고 하얀 시트커버를 덮은 것에서 나름대로 숙소로 꾸미고자 노력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구석구석 벽을 타고 자라고 있는 곰팡이 흔적들과 위층과 옆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란스런 수군거림이 낯선 타향에서의 들뜬 기분과 복잡하게 엉켜 잠이 들지 않았다. 변기와 샤워기 그리고 세면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비집고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군데군데 벽을 타고 흐르는 회색 철골 구조물들이 여행객을 더욱 낯설게 했다.


“원선생님. 연길에서 심양까지 다섯 시간이 넘는데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를 오셨어요? 저희가 너무 고맙고 미안하잖아요. 전화 주시면 연길시에 들를 수도 있을텐데.”

흔히들 중국이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대여섯 시간 걸려서 가는 것쯤이야 대수가 아니라고 여기는 분들이 많으시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 가서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기차를 타고 큰 도시를 이동하려면 우리나라 3등 객실에 해당하는 잉쭤를 타고 가는 경우 값이 싸긴 하지만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다소 불편해도 잉워를 타고 누워서 가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보통 직장인 월급에서 삼분의 일 정도는 지불해야 열차표를 구입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원선생님이 계획에도 없이 심양시로 와준 것이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원선생님의 답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차 국장님도 만나고 또 애인도 만나려고 겸사겸사 나왔어요.”
“예? 애...인...요?”

애인이라니? 원선생님 내외분이라면 원곡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금실 좋기로 유명한 부부이신데? 우리 센터에서 어디를 여행가도 늘 부부가 함께 참여하였다. 행여 부인이 공장 일로 함께 같이 못 가게 될 경우에는 원선생님은 혼자선 재미가 없다면서 차라리 집안 일을 하겠다고 여행을 빠지시던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놀랄 것을 예상이라도 하셨듯이 원선생님은 ‘친절한’ 설명도 빼놓지 않으셨다.

“중국 주요 대도시에 다 제 애인이 있어요. 베이찡, 샹하이, 텐진에도 있구요. 심지어 저 밑에 충칭과 썬전에도 있어요. 알아요 차국장님? 충칭, 썬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제격이다. 원선생님 외모 어디로 봐서 이런 바람둥이 기질을 짐작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점잖게 생긴 얼굴에 성격도 매우 내성적이고 행동을 늘 조신하게 하시는 분이셨기에, 원 선생님이 중국 주요 대도시마다 다 자기 애인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믿기 힘들었다. 내가 너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원선생님은 더 신이 나셨는지, 자신의 카사노바 이력을 늘어놓기 시작하신다.

“한국에 있는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아요?”

이 유치한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난 금실좋기로 유명한 부부의 이 미스터리한 이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요? 아마 알지 몰라요. 제 주변에 옛날부터 여자들이 아주 많았어요.”

아. 중국이란 나라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나라인 것 같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구나 라고 느낄라 치면 이따금씩 벌어지는 이런 문화적인 충격은, 중국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지 느끼게 한다.

“아 그럼. 그 애인 만났어요? 심양에서.”
“예. 차 국장님 오기 전에 잠깐 만났어요. 그리고 차 국장님 보내드린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나는 머릿속에서 온갖 궁금증이 물보라를 쳤지만 여기까지에서 멈추기로 했다.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든 분이신데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

a 심양 시내의 한 아파트 중국의 아파트는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지 않아 어두컴컴 했지만, 최근들어 이런 아파트는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심양 시내의 한 아파트 중국의 아파트는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지 않아 어두컴컴 했지만, 최근들어 이런 아파트는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 차승만


아침이 되어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왕매옥씨네 집으로 갔다. 아파트의 산뜻한 외부가 돋보였다. 중국의 아파트는 외벽에 특별한 도색작업을 하지 않아 매우 어둡고 심지어 칙칙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중국에서도 아파트 외벽에 색을 입히는 것이 유행이 되어, 새로 짓는 아파트는 매우 산뜻하고 쾌적한 느낌을 주는 곳이 많다. 천진 제선생님댁의 방 한 칸짜리 아파트와 매우 비교되는 곳이었다. 침실만 해도 두 개였고, 인터넷을 하는 작업실을 따로 갖추고 있었다.

왕선생님의 남편은 택시운전사이시다. 예전에 비해 그 수입규모가 많이 줄기는 했어도 아직까지도 택시운전사는 중국에서 꽤 큰 돈을 벌 수 있는 직업 중의 하나라고 한다.

a 경처가이신 왕선생님의 남편 왕선생님 남편은 부인을 위해 뭐든지 다 하시는 경처가이다. 오른쪽에서 두번 째.

경처가이신 왕선생님의 남편 왕선생님 남편은 부인을 위해 뭐든지 다 하시는 경처가이다. 오른쪽에서 두번 째. ⓒ 차승만


우리는 참 염치도 없다. 천진에서 매일같이 먹었던 푸짐한 아침을 기대하며 식탁이 있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식탁엔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한국의 여느 가정 같으면 왕씨 아줌마는 지금 매우 분주히 부엌 이곳저곳을 누비며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태연히 소파에 앉아서 아침 신문을 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받고 왔는데 식탁에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의아해 했다. 우리 일행은 식탁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치만 살피다 한 명이 급기야 왕씨 아주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아침은 어디서 먹는 거죠?”

왕선생님이 읽던 신문을 바닥으로 툭 던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아. 아침요? 제 남편이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많이 배고프죠?”
‘아니, 남편이 아침준비를 한다고? 남편과 부인이 같이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혼자서 준비한다고? 그리고 손님도 부인 측 손님인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게다가 부엌은 바로 저기인데, 도대체 어디서 아침을 준비한단 말이지?’

우리는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근데. 아저씨는 어디 있어요? 부엌이 여기 말고 또 있어요?”
“아. 우리는 아침을 매일 사먹어요. 요 앞에 새벽시장에 가면 아침거리들을 팔거든요. 남편이 그래서 아침식사 할 것들을 사러 간 거예요.”

우리는 왕선생님의 이 말을 듣고 과연 제왕적인 권력을 누리는 중국 여성들의 막강한 우먼파워가 가정에서 이렇게 작용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원곡동에 사는 숱한 공식, 비공식 중국 한족 동거인들의 가정에 가보면 대개가 늘 남자 측에서 요리를 준비한다.

글쎄 그럼 여자들이 시장을 보느냐고 여쭐 분들이 많으시겠다.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그것도 아니다. 시장부터 요리 그리고 설거지까지 모두 남자들이 한다. 남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왜 여자와 함께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여자가 하는 것보다 남자가 하는 요리가 훨씬 맛이 있으니까’라고 답변한다.

왕선생님. 과연 대단한 여걸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천진에 있는 애인은 왕선생님의 한 마디에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 참기름을 구하러 몇 시간을 헤매고 다녔고, 왕선생님의 남편은 부인을 위해 매일 아침 새벽시장을 나가 아침거리를 장만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원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문화적 이질감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왕선생님의 댁에서 새로운 타국의 이질적 문화 충격이 계속되고 있다.

30여분이 지나자 왕선생님의 남편이 양 손에 잔뜩 아침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아침식사 내용은 간단했다. 우선 꽈배기 도넛과 너무 비슷한 밀가루 빵이 식탁의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그리고 비닐 안에 물컹거리는 뭔가가 있었는데, 큰 냄비에 쏟아내고 보니 한국의 순두부와 무척이나 닮았다.

우리는 한여름이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를 각자의 사발에 나누어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중국이란 나라는 우리나라와 바로 인근에 있으면서도 참 매우도 다른 점 중에 하나가, 밥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며칠 전 제선생님 댁에서도 그랬지만, 이분들은 밥 대신에 빵을 주식으로 하신다(물론 많은 중국인들에겐 역시 밥이 주식이다. 그런데 밥 대신 빵을 대용으로 하시는 중국인들이 아주 많은 것도 사실이다).

a 왕선생님 댁 주방 새벽 시장에서 갓 사온 순두부와 함께 조촐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왕선생님 댁 주방 새벽 시장에서 갓 사온 순두부와 함께 조촐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 차승만


먼 타국에서 온 손님, 그리고 그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 단촐한 식탁이었지만 우리는 누구도 왕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곡동에서 이분의 시원시원한 성격을 익히 잘 알아온 터였기 때문이다. 체면 같은 것을 조금도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실속을 우선시 하는 여장부이다. 왕선생님은 원곡동에서 전자부품회사에 다니면서 여공으로 일을 하셨다.

주중에는 주간과 야간을 번갈아 하시면서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힘겹게 소화하신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세련된 옷과 각종 화장품으로 온갖 치장을 다하고 맵시 있게 원곡동 주택 사거리와 국경없는 거리를 활보하시는 씩씩하고 낭만적인 아주머니이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시내 관광을 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왕선생님은 인터넷 전용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잠시 후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연신 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오늘 하루 종일 택시 영업을 정지하고 우리를 안내하겠다며 아래층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세차를 하고 있다.

“차국장님 빨리 이리 와보세요. 빨리요.”

왕선생님은 인터넷 방으로 급하게 나를 부른다. 놀라운 광경을 다시 또 목격했다. 왕선생님은 그 사이 천진에 있는 회선생님과 화상채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면 건너편에서는 엊그제 헤어진 회선생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국장님. 안녕하세요? 잘 도착했어요?”
“아...네...”

나는 내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왕선생님... 저기... 남편 보시면 뭐라고 안 할까요?”
아휴. 난 늘 왜 이런 질문만 머리 속에 가득할까?
“괜찮아요. 우린 친구예요. 그냥 친구. 남편 괜찮아요.”

그래 친구는 친구다. 그렇지만 한때는 동거까지 했던 친구인데, 어쩜 이렇게도 태연자약할 수가 있는 것인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상대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적어도 이주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활동가가 가져야 할 아주 기본적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선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너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더 이상 혼란스런 상태를 겪지 않기 위해 빨리 심양시내를 보러 가자며 일행을 재촉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 안에 존재하는 나에게만큼은 난 절대적인 가치를 믿고 또 지키고 싶다.

“차 국장님 어디가 제일 가고싶으세요?”
“서탑가! 당연히 서탑가예요!”

나는 심양에 머무를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에 서탑가로 가자고 했다. 서탑가. 중국 말로는 시타제. 1996년 성남이주노동자의 집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하던 시절부터 중국동포들에게 귀에 닳도록 들었던 곳, 심양 시내의 코리아타운, 서탑가이다.

“시타제 거기 끝내주지뭐이. 한국 노래빵, 가라오키, 뭐 없는 게 없지뭐이.”
“차 국장님 중국에 꼭 한번 와요. 내 서탑가 데리고 가서 아주 비싼 거 사줄테니께니. 거기 북조선사람들이 일하는 냉면집도 있어서리 아주 맛이 좋다구.”

우리나라로 치면 압구정동이라도 되는 걸까? 중국이란 나라가 워낙 하루가 멀다하고 빠르게 변하는 나라라서 함부로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그런데 많은 재중동포들이 심양시내 서탑가를 이야기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중국 내 코리아타운치고는 꽤 번화가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지역에는 북조선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a 서탑가의 시내 풍경 한글 간판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가야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서탑가의 시내 풍경 한글 간판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가야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 차승만


a 북조선 음식점 북조선 음식점 묘향산. 북조선 출신 예술인들이 식당 한 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한다.

북조선 음식점 북조선 음식점 묘향산. 북조선 출신 예술인들이 식당 한 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한다. ⓒ 차승만


a 중국 파출소 중국 파출소. 우리나라 파출소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중국 파출소 중국 파출소. 우리나라 파출소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 차승만


서탑가에 도착하니, 과연 중국 내의 작은 대한민국이었다. 냉면집, 갈비집, 목욕탕, 심지어 개고기집까지 한글 간판이다. 한국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는 노래방 역시 어김없이 서탑가의 주요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탑가는 무엇보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독립투사들의 부인들이 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업을 했던 곳이다. 매우 뜻깊은 곳이다. 나는 한글로 된 간판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피며 서탑가 구석구석을 걸었다. 이곳을 찾는 재중동포나 한국 관광객들 누구든지 서탑가에서 잠시만이라도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으리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탑가에는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그 어떤 기념비나 기념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미래를 부르짖었고, 산 자는 현실을 즐긴다.’ NGO 활동을 하는 동안 내가 겪은 현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대의명분을 위한 선각자들의 희생. 글쎄 '냉혈히' 이야기해서 그것이 훗날 세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소수의 뛰어난 선각자들은 이름을 남김으로써 사후에라도 명예를 누리고(물론 이것조차 살아 있는 자들의 관념일 뿐이지만), 그 뛰어난 선각자들의 주변에 머물렀던 숱한 사람들은 그냥 미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뿐이다. 그리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가져다 준 모든 풍요와 축복을, 후세대 사람들은 ‘마음껏’ 즐길 뿐이다.

그래 NGO 활동가들에게 많이들 이야기한다.

“누가 하래? NGO 활동 누가 시켰어? 안하면 될 거 아냐?”

많은 청년들이 NGO 세계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많이도 나갔다. 어쩌면 기성세대보다 명예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한 곳이 NGO 세계가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본다. ‘더 높은 곳을 향한 숨 가뿐 진군’은 어쩌면 NGO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가끔 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했던 이 곳에서도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의 세계가 이미 형성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끔찍한 생각일까?

난 독백처럼 토해내던 그 비아냥거림과 체념을 넘어서고 싶다. 미래를 부르짖었던 죽은 자들과 현실을 탐욕스럽게 즐기는 산 자들 사이의 수레바퀴를 벗어나고 싶다. 아직은 그 답을 알 수 없다.

이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내 길을 가고 싶다. 서탑가에 흐르는 가라오케의 황량한 노랫소리는 어차피 누구도 영원히 즐길 수는 없는 것. 세상은 감동으로 움직여지고, 선각자들의 감동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생기넘치는 파동으로 살아남아 있다.

우리는 구부러진 길 위에서 조금씩 걸어갈 뿐. 적어도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그 느린 발자국을 뗄 뿐이다. 여행이 이렇게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이주노동자 #재중동포 #서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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