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서점에서 받은 '충격'

등록 2007.11.22 16:01수정 2007.11.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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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다닐 때니까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종종 시내 대형 서점에 가서 윈도우 쇼핑을 하다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이 보고 싶고 값 싼 책을 발견할 땐 사고 했을 때다. 나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구경하는 쪽이었다. 그 중에서 역사와 문학 관련 책 코너를 자주 어슬렁거렸다.

 

서울 외곽에 살면서도 답답할 때면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그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 과제물이 있을 때면 서점 한 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필요한 부분을 베낄 때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고학생의 어려운 사정이 그러한 마음을 쉬 접게 만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마 그 날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서점에 들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매우 여유로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으로 보면 아마 어느 연휴가 아니었나 싶다. 예의 그 인문 사회 코너에 가서 이것 저것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코너을 거쳐 지나가고 있는 것을 책을 보면서도 알 수 있었다.

 

그 때 한 '아이'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족히 40대 중반은 되어 있을 그를 '아이'로 표기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중학생임에도 몸집이 작은 편에 속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유심히 보니 그가 집는 책은 그 또래 아이의 책이 아니었다. 역사 책을 몇 권 골랐는데, 모두 논문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도 들어 있었다.

 

그 아이가 고른 책 중에는 대학생인 내가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도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때 그 아이를 본 사람은 그가 책 심부름을 하러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바빠서 서점에 나올 시간이 없는 아빠의 심부름이거나 아니면 서점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삼촌의 심부름 쯤으로 치부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책을 고르는 눈과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목차를 훑어보기도 하고 중간 중간 책을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그가 책의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논문을 모아 엮은 역사책은 당시만 해도 한자 투성이어서 나이든 사람들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책을 검토하는 시늉까지 보이다니...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누구 책 심부름 왔니?"

"아니요."

 

"그런 어려운 책을 설마 네가 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예요, 제가 볼 책이예요."

 

"네가 그렇게 어려운 책을 본다 말이야?"

"이런 책들을 계속 보아왔어요."

 

"지금 몇 학년인데?"

"중 2예요."

 

나는 그 날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충격 말이다. 우리 나라의 국민 1인당 독서량이 선진 제국(諸國)에 비해 몹시 떨어진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을 때였다. 그 보도를 접하면서 적어도 나는 평균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을 때였다. 그 아이는 그런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이 저런 이론서를 이해하면서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말에 대한 어휘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고 나아가 한문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더 이상의 대화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나는 황급히 서점을 빠져 나왔다. 그 이후 서점에 갈 때마다 아니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난다. 한 번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는 나의 사고력 확대에 큰 경쟁자로 자리잡아 왔다. 그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법고시를 패스한 판검사는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싸움에 능해야만 하는 정치인은 더욱 아닐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는 지금 연구실에서 책과 씨름하며 탐구에 영일이 없는 중견 사학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07.11.22 16:01ⓒ 2007 OhmyNews
#중 2 #독서 #역사 책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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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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