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유럽특파원과 사회부장을 역임한 보도국 홍순관 부장이 최근 드라마 개발·제작을 위해 '스토리 허브'라는 사내 벤처 1호를 설립하고 자리를 옮겼다.
남소연
불현듯 그들이 생각난 것은 아마도 거꾸로 가는 듯한 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짓이 당당하게 위세를 부리는 세상, 거짓이 드러나도 막무가내로 우기면 통하는 세상, 거짓이라도 좋다는 세상 때문에 그들이 더 생각났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런 그들 때문에 비록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도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실마리나마 잡아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는 한 가닥 희망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5년 전 기자였던 그들은 이제 모두 사장이 돼 있다. 한사람은 MBC 사내 벤처 회사 사장, 또 한 사람은 전주방송의 사장이다. 그 둘은 15년 전 MBC 사회부 기자였고, 차장이었다. 당시 홍순관 기자, 그리고 김택곤 차장이 바로 그들이다.
1992년 2월 9일, <MBC 뉴스데스크>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문서위조단이 적발됐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그러나 단순한 사기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까지 연루된 사건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전문가가 문서를 허위 감정해주고 돈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됐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MBC 뉴스데스크> 기사 그동안 국과수가 내놓은 숱한 문서감정의 진실성이 송두리째 의심받을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과수의 문서감정 결과를 유일한 증거로 채택한 수많은 민·형사 판결의 정당성 또한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돈을 받고 문서를 허위 감정해줬다는 의혹의 주인공이 또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이었다. 당시 한창 항소심 공판이 진행 중이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결정적 물증인 유서 대필 감정을 했던 장본인이었다.
노태우 정권 말기 최대의 공안사건이었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토대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었다. 돈을 받고 문서를 허위로 감정해주었다면, 어떻게 그가 내놓은 필적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파장의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검찰 등 법조를 출입하던 홍순관 기자는 이날 보도 때까지 수개월을 잠행 취재했다. 노태우 정권 때였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지만, 방송에 대한 정부의 입김은 여전했다. 통제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사건팀장인 김택곤 차장만 취재 사실을 알았다.
주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다른 출장 건으로 위장해 지방취재를 가기도 했다. 수개월간의 잠행 취재 끝에 국과수 김형영 실장에게 허위 감정 청탁을 알선해 준 사설감정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보도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았다. 뒤늦게 이 같은 취재사실을 알게 된 방송사 윗선에서는 기사 내용과 그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사를 내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일요일이 거사일로 잡혔다. 일요일은 방송사는 물론 권력기구의 시스템이 잠시 쉬고 있는 때니까. 적어도 숨 돌릴 여유는 벌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문서 전문위조단 사건 용의자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 기사 파장은 컸다. 새로운 사실들도 드러났다.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이 바로 1년 전 경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서 전문위조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경찰 수사는 상당히 깊숙이 진행됐다. 김씨를 직접 불러 조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돌연 중단됐다. 당시 경찰은 "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수사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발동됐다는 것이다.
김형영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MBC 홍순관 기자의 보도가 있은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김형영씨 등 6명이 구속됐다. 뇌물 수수 및 뇌물 공여 혐의였다. 전광석화 같은 신속한 수사였다.
하지만 검찰은 김형영씨가 "허위 감정은 하지 않았다"고 수사 결론을 발표했다. 돈을 받은 것은 "사례비로 알고 받은 것이지 허위 감정의 대가로 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이었다. "돈을 주면 김씨로부터 허위감정을 받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브로커의 녹취는 무시됐다.
김씨는 1심에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당시 서울형사지법 항소1부(재판장 송기홍 부장판사)는 92년 9월 김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해 김씨를 풀어주었다. 국가공무원으로 20년간 근무한 것, 면직 처분 등 '사실상 처벌'을 받은 점을 참작하고, 앞으로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결정적인 물증이었던 필적 감정을 한 장본인이 사건 관계자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까지 됐지만 강기훈씨는 결국 유죄가 확정됐다. 정의는 바로 집 앞에서 길을 잃었다. 다시 제 길로 들어서는 데 1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람들 뭐라고 그래요? 김형영씨, 그 때 강기훈씨 수사했던 검사, 그리고 판결 내린 판사, 그 분들 뭐라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