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고미야마씨, 아오야기씨 부부, 필자.
우광환
"우 상,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일본에 오시거든 꼭 연락 주십시오."
지난 12월 2일 오후 1시, 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시종 밝은 얼굴이었던 휠체어 위의 아오야기 시게오씨 목소리가 흔들렸다.
전신 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감싸안고 인사하는 내 앞에서 그의 아내 노리코씨가 눈물을 보였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힘있게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하던 서른세살 남자 고미야마 게이스케씨의 눈동자도 기어이 흐려졌다.
나는 세 사람이 출국수속실 안 쪽으로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한참 후까지도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지난 2박3일간 함께 했던 시간은 이토록 우리 가슴에 넉넉한 정을 남겼다.
10여년전 동경에서의 '빚'을 이제 갚다<오마이뉴스>에서 '한일 시민 친구 만들기' 행사에 참여할 시민기자를 모집한다는 사고(社告)를 발견한 것은 신청 마지막 날의 턱걸이 시간이었다. 그동안 시민기자 활동을 하지 않은 나이기에 그 공지를 건성으로 넘기려다가 하단 부분의 '통역 봉사자도 모십니다'라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내 머릿속엔 오래 전의 내 이웃이었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갔다. 10여년 전 동경 변두리 한적한 마을에서 가족과 헤어져 홀로 2년을 살 때 신세를 많이 졌던 사람들이었다.
기초 일본어마저 더듬거리던 그 때, 필요한 물건을 어디에서 싸게 살 수 있는지, 외출할 때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할 줄 몰랐다. 당시 한국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을 때라 쓰레기를 왜 분리수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한심한 외국인인 나를 위해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심지어는 혼자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그들은 나를 동네 사랑방인 작은 술집에 데리고 가 함께 술을 마셔주었고, 노래를 가르쳐 주었으며, 가미오씨 부부는 자청하여 주일마다 내 집까지 와서 한동안 일본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럴 때면 요리가 서툰 나를 위해 가미오씨 부인은 다양한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싸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그 분은 내 입맛에 최대한 맞추기 위해 한국요리 책까지 사서 연구를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단순히 "신세를 졌다"는 표현으로는 적절치 않은, 나로서는 눈물겹도록 너무도 큰 '은혜'였다.
일본인들에게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순간을 기대하며 내가 이번 <오마이뉴스> 행사에 통역사로라도 신청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내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지원했을 그 행사에 내게까지 차례가 올 것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러나 내 불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본어 실력임에도 워낙 자기소개서에 양념을 잘 쳐서인지, 며칠 후 <오마이뉴스>로부터 행사 참여에 대한 안내장과 함께 귀중한 오더까지 덤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행사 통역사로 채용된 것은 물론, 일본인 참가자 중 중증장애인 아오야기씨의 차량 이동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버스로 다니게 되겠지만 그 사람만은 그렇게 할 수 없기에 따로 차가 필요한 상황인데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미안해 하며 말하는 <오마이뉴스> 강지은 기자에게 나는 오히려 매달리다시피 그 임무를 얻어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