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캠퍼스 주변 성범죄 잇따라, 인식전환 절실

등록 2007.12.07 20:56수정 2007.12.0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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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성균관대학교 인사캠퍼스 곳곳에는 자신의 성추행 피해사례를 밝히는 글과 함께, 다른 학우들의 캠퍼스 주변 성범죄 피해사례를 수집한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그동안 자취촌에 사는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해, 매스컴을 통해서 혹은 지인들을 통해서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이상 그것이 피부로 다가오진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학교 주변에서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니. 한동안은 밤길 다니는 것도, 자취방에 혼자있는 것도 무서웠다.

지난 12월 4일 성균관대학교 총여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총여학생회)와 함께, 성추행 사건 피해자이자 성범죄 피해사례를 수집하는 대자보를 써붙인 A양(실제 이름과는 관련없음)을 직접 만났다.

"성추행 당하기 전과 후 세상은 너무도 달랐다"

 성대 쪽문 근처 자취촌. 수많은 집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성대생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성대 쪽문 근처 자취촌. 수많은 집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성대생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홍현진
A양이 성추행을 당한 것은 지난 9월 18일 7시 20분쯤, 추석이 되기 며칠전이었다.자취방으로 가고 있던 A양의 가슴을 누군가 만지고 달아난 것이다. A양이 성추행 당한 곳은 학교 쪽문(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고 가로등도 있는 곳이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던 A양은 평소에 성추행과 관련 이야기를 접했을 때, 자신이 만약에 그런 일을 당한다면 성추행범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근처 파출소 전화번호까지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다녔다는 그녀는 그러나 성추행을 당한 그 순간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만 났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성추행을 당하기 전과 당하고 난 후의 세상은 너무도 달랐다고.

그녀는 파출소에도 가보고 교내 학생지원팀에도 찾아갔지만 가해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곧 긴 추석연휴가 다가왔기 때문에 사건 해결은 그렇게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A양은 순간순간 성추행범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한 달쯤 뒤에 성균관대학교 커뮤니티인 '성대사랑'을 통해 또 한 건의 성범죄 사례를 접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취방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성범죄가 발생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이는 성균관대만의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만 잠깐 치안이 강화되는 듯 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A양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다른 여학우들의 피해사례를 수집하면서 자신이 당한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며 학교 주변 치안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총여학생회와 함께 교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피해사례를 수집했다.

11월 30일까지 총 15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되었고, 자취촌 근처에서 성추행을 시도하던 가해자 한 명(만 16세)이, 대자보를 본 성대 남학생에게 붙잡혔다. 현재 A양은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혜화경찰서에 의뢰하여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인데 범죄 유형을 살펴볼 때 총 4~5명 정도의 가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고하기 두려운 피해자들

피해자들의 사례를 수집하면서 그녀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사를 하려면 피해자들의 협조가 있어야 하는데 밝히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연락이 끊긴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가 신고를 하고 수사를 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2차·3차의 피해를 입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A양 역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과정에서 왜 사람들이 신고를 안 하는지, 이 과정을 끝까지 끌고 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요청을 통해 여자 경찰과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남자 경찰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찰서에서 자신이 겪은 성추행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것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내 성평등상담실 B연구원은(실제 이름과는 관련없음) 캠퍼스 주변에서 일어나는 성범죄의 유형이 강간과 같은 비교적 높은 수위의 성범죄가 아니라 가슴을 만진다든지, 자위를 한다든지 하는 비교적 낮은 수위의 성범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서 그냥 신고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2007년 한 해 동안 학교 측에 신고된 성범죄는 지난 11월에 A양이 신고한 것이 처음이었는데 A양이 보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접수받은 피해사례가 15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밝혀지지 않은 성범죄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성균관대학교 학생상담센터 내 성평등 상담실. 성희롱·성폭력 피해에 대한 대응책과 심리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학생상담센터 내 성평등 상담실. 성희롱·성폭력 피해에 대한 대응책과 심리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홍현진

'성대 사랑'에 올라오는 피해사례들을 보면 그 범행수법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는 것은 물론 모방범죄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범죄가 발생해도, 신고가 되고 가해자가 처벌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고를 한다고 할지라도 어디에 가서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A양의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교내 학생 지원팀과 성평등상담실·총여학생회 그리고 명륜동파출소·대학로지구대·혜화경찰서를 방문해야 했다.

이와 같은 불편과 혼란을 없애기 위해  성평등상담실의 B연구원은 "성범죄를 신고할 수 있는 창구를 단일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변화 중요

현재 총여학생회와 학교 측에서는 캠퍼스 주변 치안문제와 관련하여 대응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학교 측의 대응방안을 물어보는 질문에 B연구원은 쪽문 근처 어두운 지역에 가로등을 설치할 계획이며, 총여학생회 측에서 여학생들을 상대로 호루라기를 나눠줄 거라고 했다.

다른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순찰대를 조직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학생들이 순찰 도중에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우려해 현재 대응 방안에서는 배제된 상태라고 답했다. 대신에 경찰 측에 주기적으로 순찰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했다.

A양은 총여학생회와 함께 앞으로 '반 성폭력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사실 가로등, 비상전화, 순찰대와 같은 가시적인 변화가 여학우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가해자들에게도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고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비교적 수위가 낮은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성범죄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성추행이나 성희롱의 경우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가벼운 에피소드 정도로만 묘사되어 왔다. 또한 일반 사람들도 성추행과 성희롱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피해자 여성에게는 그 수위와 관련없이 성폭력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A양은 성범죄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두려움에 떨고만 있는 여학우들이 자기의 몸을 자기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다음 학기부터 '자기방어훈련'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인적 복수심에서 시작된 일이에요. 제 자신을 위해서요." A양은 말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이 있었을 텐데도 자신의 성추행 피해사례를 공론화하고 반 성폭력 운동에 앞장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단순히 그녀 자신만을 위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학우들의 지지와 관심은 부족한 상황이지만 그녀의 용기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범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범죄예방을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 여성의 전화 홈페이지 http://womanrights.org/
서울 여성의 전화 홈페이지 http://womanrights.org/서울 여성의 전화

#성범죄 #캠퍼스 치안 #성추행 #성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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