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을, 같게 하라

[노순택의 사진 한 장, 생각 잠깐 30] 산골분교의 평범한 원칙

등록 2007.12.07 13:18수정 2007.12.0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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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분교 운동회 ⓒ 강재훈

산골분교 운동회 ⓒ 강재훈

 

어느 날,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 비판을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해 보시죠. 당신 말대로 국민 하나하나가, 물론 한 명도 빠짐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좀 똑똑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큽니다…… 누가 고생하라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부탁한 적 있나요? 능력 있으면 대우받는 게 당연하죠. 그렇죠? ^^*"

 

 적지 않은 시간을 고민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나는 한 번도 "국민 하나하나가, 물론 한 명도 빠짐없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거니와, 능력이 있어서 대우받는 사람들을 시샘하거나 비난해 본 적도 없는데, 익명의 누군가는 왜 그런 글을 내게 쏘아댄 것일까.

 

강재훈 개인전 <산골분교 운동회>를 보고 난 뒤, 나는 다시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 강재훈에게 쏘아 보자.

 

"강재훈 씨…… 비판을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해 보시죠. 당신 말대로 국민 하나하나가, 물론 한 명도 빠짐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좀 똑똑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큽니다…… 누가 고생하라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부탁한 적 있나요? 능력 있으면 대우받는 게 당연하죠. 그렇죠? ^^*"

 

강재훈의 대답을 상상한다. 아마도 이럴 것이다.


"누가 나더러 산골분교가 처한 오늘의 장면을 필름에 담으라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부탁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내 돈을 쪼개어 차비와 밥값을 마련하고, 16년간 산과 물을 건너 분교를 찾아 다녔지요. 이 학교 하나하나가, 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한 명도 빠짐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품기에는 내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숱한 시간을 고민해 보았지만, 이거다 하고 내놓을 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도 소중한 것이지, 대안을 가진 사람에게만 문제의식을 드러낼 자격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능력이라… 능력이 있으면 대우받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다만, 오늘의 산골분교가 감당해야 하는 위기가 능력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한 아이가 서 있다. 2000년, 강원도 홍천강 모곡초교 강아분교

 

운동회 개막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아이는 준비체조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낯익은 자세다. 어린 시절 지겹도록 갈고 닦아야 했던 ‘국민체조’의 한 동작과 꼭 닮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의 얼굴이 굳어 있다. 아침부터 엄마에게 혼쭐이 난 걸까. 아니면 달리기 시합에서 1등 할 생각을 골똘히 하는 걸까.

 

그러긴 글렀다. 달리는 도중에 녀석의 운동화가 벗겨질지 모른다. 오른발 운동화의 '찍찍이'가 넋 나간 듯 풀려있다. 상표가 눈을 끈다. 세계 3대 스포츠용품 브랜드로 꼽힌다는 아디다스에 작대기 한 개를 더 그어 넣어 품질을 강화하고, 가격은 대폭 낮췄다는 '어디다수'가 아닌가.

 

아이야, 이 아저씨도 '푸로수팩수'와 '조선내이키'와 '품와', '어디다수'를 신고 학교 문턱을 들락거렸던 추억을 가슴에 품고 있단다. 아이의 얼굴 뒤로는 개선문이 버티고 섰다. 마치 아이의 머리를 겨냥해 씌워 놓은 듯하다. 그 기둥을 따라 선명한 구호가 흐른다. "알차고 슬기롭게, 힘차고 질서 있게…"

 

학고재에서 열렸던 <들꽃피는 학교, 분교> 이후 8년 만에, 강재훈은 분교 이야기로 다시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에는 신나는 운동회 이야기다. "분교에 많은 어려움이 닥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 희망이 분출되는 상징적인 행사가 바로 운동회였다"고 강재훈은 말한다. 그가 전시와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사진들에는 깔깔거리는 웃음이 배어있다. 어머나, 이것 좀 봐, 하는 감탄 속으로 사람을 이끈다. 때 묻지 않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 강제훈의 사진은 그 경계에 서 있다. 훈훈함과 쓸쓸함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강재훈의 사진은 '출발선'에 대해 고민할 것을 촉구하는 듯하다. 무엇이 더 인간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인지 가치판단을 유보한다 하더라도, 도시와 산골의 아이들은 출발선이 다르다. 처음부터 벌어져 있던 간격은 결승지점에 이르면 계측을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 우리 사회 인생의 법칙이다. 각종 통계와 지표가 이를 방증한다. 이른바 명문대에서 사투리가 사라지는 현상은, 부유층 자녀들의 명문대 독식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은 이제 사라질지도 모른다. 교육의 불평등이 인생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것의 수혜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화가 나는 건, 그 수혜자들이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로 바꿈질하려든다는 점이다. 이런 불순한 시도는 "능력도 없으면서 불평만 해대는 자들 때문에, 늘 능력 있는 사람들만 피해를 본다"는 식의 피해망상으로 이어진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남겼던 누군가 역시 그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이기심'이 있기에 가능했다. 능력을 갈고 닦은 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할 것인가. 능력 있으면 대우받는 게 당연하다. 그게 상식이다. 문제는 그것이 상식의 선을 넘어 과도함으로 치달을 때다.


엇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엇비슷한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그 대우에 있어서는 울분과 충성을 교차시켜버리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학급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를 칭찬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를 꾸짖는 일은 납득할만하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칭찬이라는 대우를 받을만하다. 허나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공부 잘하는 아이의 몫까지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면, 그게 옳을까? 공부를 잘 할수록 똥오줌을 덜 누게 된다면 모를까, 화장실은 너나없이 이용하는 공간이 아닌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화장실 청소를 면제시키는 건 능력에 대한 과도한 대우다. 공부를 못하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 함께 커 갈 수 있도록 돕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자세다. 능력이건, 돈이건, "있는 놈에게 몰아주어야 고도성장할 수 있다"는 식의 몰염치한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교육의 근간마저 뒤흔드는 일이 과연 옳을까?

 

나와 삼성재벌 3세 이재용의 출발선이 달랐던 것처럼, 산골 아이들과 부유층 아이들의 출발선은 다를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교육은, 서로 다른 출발선을 당장 수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격차를 줄여야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열심히 땀 흘리기만 한다면,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가르침이 공허하지 않아야 한다. 교육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많은 작가들이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전시를 고민하고 있는데, 강재훈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진으로 이러한 고민과 반성을 촉구한다(이는 강재훈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그의 사진에는 훈훈함과 쓸쓸함이 공존하고 있지만, 그 사진 속의 훈훈함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쓸쓸함을 미안하게 한다.

 

대안이 무엇인지는 강재훈도 모르거니와, 누구라고 해서 쉽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중한 그 무엇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공유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따로 또 같이' 고민하고 머리를 맞댄다면 어떤 열쇠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 첫걸음으로 우리의 현실이 내놓은 장면들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강재훈은 제안한다.

 

산골분교 운동회의 달리기 시합에는 언제나 1등과 꼴등이 있다. 당연히 출발선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산골분교에서 통하는 평범한 원칙이, 왜 능력 있는 자들이 득시글대는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1. 이 글은 지난해 열렸던 강재훈 개인전 리뷰를 위해 썼던 것이다. 전시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그의 사진집 <산골분교운동회>는 지금이라도 사 볼 수 있다. 사진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지만, 고가의 카메라 샀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넘쳐나도 사진집을 '읽고' 고민을 나누는 사람은 없어 슬프다.

2.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삼성의 재산증여 과정을 보면, 사진 속의 아이 얼굴 들여다 보기가 민망하다.

3. 도덕성이야 어쨌건, 탈세야 어쨌건, 능력만 있으면 대통령감이라는 세상꼴을 보자면, 내 아이 얼굴 들여다 보기도 민망하다. 1등에게 몰아줘야 나머지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 병폐를 낳고 있는지 작금의 '삼성꼴'와 '대선꼴'이 말해주고 있지는 않은지.

4. 이 글은 정보공유 라이센스 2.0을 따른다. 개작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한 자유로운 복제가 가능하다. 

2007.12.07 13:1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1. 이 글은 지난해 열렸던 강재훈 개인전 리뷰를 위해 썼던 것이다. 전시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그의 사진집 <산골분교운동회>는 지금이라도 사 볼 수 있다. 사진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지만, 고가의 카메라 샀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넘쳐나도 사진집을 '읽고' 고민을 나누는 사람은 없어 슬프다.

2.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삼성의 재산증여 과정을 보면, 사진 속의 아이 얼굴 들여다 보기가 민망하다.

3. 도덕성이야 어쨌건, 탈세야 어쨌건, 능력만 있으면 대통령감이라는 세상꼴을 보자면, 내 아이 얼굴 들여다 보기도 민망하다. 1등에게 몰아줘야 나머지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 병폐를 낳고 있는지 작금의 '삼성꼴'와 '대선꼴'이 말해주고 있지는 않은지.

4. 이 글은 정보공유 라이센스 2.0을 따른다. 개작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한 자유로운 복제가 가능하다. 
#강재훈 #분교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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