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야만인'들에 관해

그 '문화인'들이 만든 왜곡과 거짓의 이미지

등록 2007.12.08 18:43수정 2007.12.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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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책을 펼치면 참 많은 '야만인'들이 나옵니다. 인류의 지혜가 빛나는 문화 업적을 기록한 장을 펼칠 때는 마냥 흐뭇하던 마음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야만인'들의 만행은 정말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잔인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대륙에도 '야만인'들이 있었습니다. 흉노, 바이킹, 마쟈르, 몽고족 등등. 고금 문명 세계의 역사가들은 이들 '야만인'들이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한 마을, 아이나 동물까지 한꺼번에 학살한 그 처참한 현장을 보면서 치를 떨었습니다.


그들이 분노를 담아 남긴 기록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이들 '야만인'들의 잔혹상을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느끼며 전율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율과 분노의 와중에서도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과연 이들 '야만인'들은 처음부터 야만인들이었을까요? 역사가나 시인들이 기록한 대로, 그들의 심장에는 원래부터 치유할 수 없는 ‘카인의 낙인’이 찍혀있던 것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야만인'들을 찬찬히 살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두 처참할 정도로 각박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극심한 추위 아니면 타는 듯한 더위, 농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척박한 땅, 또는 맹수와 질병.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병자나 약자한테까지 나눠줄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의지해봤자 도와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자기만을 믿어야 했을 겁니다. 다른 인간들은 자신의 식량을 뺏는 적이 아니면, 자기를 위해 남의 식량을 뺏어올 부하, 둘 중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존’하나만 생각하기에도 비좁은 머리속에 당연히 문화니 도덕이니 하는 사치스런 것들을 가꿀 공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론 열악한 자연 환경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최후의 선택지가 바로 "따뜻한 남쪽 땅"으로 일단 내려가보자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낭만적으로 묘사된 여행이나 탐험담하곤 거리가 멀었습니다.


바이킹들의 배는 좁고 지붕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북유럽의 차가운 바다와 무자비한 폭풍우를 맨몸으로 견뎌내면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나침반도 없었으니 항해는 별의 위치 등 원시적 자료와 직감에 의존해야 했고, 그나마 안되면 오딘 신의 가호나 바라면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런 고통과 위험까지도 감수하면서 내려와야 할 정도로 그들의 고향이 진력나는 곳이었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항해 과정에서 그들의 무자비함이 더욱 배가되는 건 당연합니다.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을 때 배에서 내려온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도 버려버린 야수들 뿐이었습니다. 다른 육상에서 활동한 '야만족'들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유목생활’하면 고전 서부 영화에나 나올 낭만적인 풍경밖에 떠올리지 못할 우리 현대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참혹한 환경이 흉노족을, 거란족을 그리고 몽고족을 끊임없이 ‘중원’을 향해 야수같이 덤벼들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만족’들의 본성이 그들 몸속 어딘가에 애초부터 새겨져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바이킹도 프랑스 등지에서 왕의 허락으로 정착한 다음부터는 주일에 교회 나가고 평일에는 땀흘려 농사짓는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 되었다는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가톨릭 세례에 무슨 신성한 힘이 있어서 '짐승'을 '사람'으로 둔갑시킨 건 아닐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상대적인 뜻입니다만)이 주어지자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아니 모든 인간 마음 속에 원래부터 있는 선량한 본성이 그제서야 잔인함을 억누를 힘을 얻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야만족'들은 우리의 생각처럼 '강철같은 강인함과 잔혹함, 맹수성'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환경에 맞춰 그 본성이 얼마나 다르게 변하는지 보여주는, 즉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야만인'들의 만행을 비난하고 저주한 '문명인'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교양있는 일만 벌인 건 아니었습니다. 사자와 인간을 싸우게 하고 구경하는 로마인들의 취미는 아무리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려고 해도 그저 변태적인 악취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게르만족 등 '야만인'을 정벌한다는 구실로 얼마나 많은 잔학행위를 저질렀습니까? ‘중원’의 역대 왕조들 역시 틈만 나면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구실로 그들의 추장을 잡아다 고문하고, 마을을 공격해 불태우는 짓을 태연히 자행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침략 전쟁을 벌였던 고구려 왕 담덕이나 여진 '정벌'을 했던 윤관도 결코 좋게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한 쪽이 잘했고 다른 쪽은 무조건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에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야만인’에게만 책임을 돌린 이들 '문명인'들의 진정한 '만행'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문명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이용해 '야만족'의 이미지 자체를 가공해 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다른 말과 문화, 종교를 갖고 있으면 무조건 ‘바르바로이’라고 부르며 멸시한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만이 진정한 ‘문화’라고 주장하며, 글이든 무력이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힘이 약한 민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상당수 ‘야만족’들은 불행히도 자신만의 문자를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그러나 문자의 있고 없음이 꼭 ‘문명’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잉카나 마야 문명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집니다), 이런 ‘문명인’들의 전방위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문화 사회’니 ‘지구촌’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는 현대 국제 사회는 과연 이런 ‘야만적’인 풍경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오히려 더 상황이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미국과 서유럽 등 이른바 ‘문명국가’들은 이제 자본과 미디어라는 물질, 정신 양 부문에서 초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범위가 넓어진 ‘후진국’과 ‘소수민족’들은 그들이 간간히 뿌려주는 외화의 달콤한 혜택 때문에 스스로 주체성을 포기하고 종속을 자처하며, 스스로의 문화와 역사를 비하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립니다. 말로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실은 과거보다 더 강력하고 흉폭한 ‘문명’의 ‘야만적 지배의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역사 #문명 #야만 #야만인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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