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7.12.10 20:22수정 2007.12.10 20:24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손과 귀를 시리게 하고, 코끝을 빨갛게 냉기로 스쳐 이젠 제법 겨울임을 실감케 한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서 한량없는 허공으로 녹아 사라진다. 깜짝 추위로 긴장하여 닭똥집처럼 오므라진 아이들의 입에서도, 그들을 맞이하느라 반가운 나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은 쉴 새 없이 발산되고 있다.
오늘은 12월의 둘째 놀토(노는 토요일)날이다. 나는 오늘도 그간 답사여행의 친근한 벗들인 아이들을 만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물찾기하듯 놀러 간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우르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노는 토요일로 비교적 이른 시간인데도 지하철 안은 아이들의 엉덩이 반쪽도 비빌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모습에 피곤해 보이는 군상들.
지그시 눈을 감아 짧은 동가리 겉잠에 빠진 멀쑥한 도시인들의 일상이 연민의 시선으로 감지된다. 아이들은 지하철 속의 마치 약속된 듯한 기계적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량의 차 칸을 서서히 점령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새 아이들은 친구들과 마주 서서 차체의 진동에 발을 떼지 않고 오래 버티는 기발한 놀이판을 벌이고 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헤매던 사람들의 눈빛이 아이들을 슬쩍 바라도 보고, 아이들의 놀이를 힐끗 웃으며 즐기는 관중의 모습으로 은근슬쩍 바뀌어 가기도 한다.
정류장 하나를 지날 때마다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짧은 지하철 속의 인연은 아쉽지만 그렇게 스치며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 소멸해 갔다.
얼마 후에 우리는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 도착했다. 출구를 빠져나와 박물관 쪽으로 가는 길가에 만추의 낙엽인지, 대설(12월 7일)을 바로 넘긴 한겨울의 낙엽인지 모를 이파리들이 세월의 패잔병처럼 수북이 깔려있다. 길가의 ‘서양 왕버즘나무’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한 넓적한 마른 이파리들이 꽤 많이 있다. 그것들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쏠리며 황천으로 향하는 자연 순환의 이치 앞에서 아마도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담장 옆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또 우연히 담장 너머를 바라다보게 되었다. 멀리 US. ARMY란 글씨가 비교적 뚜렷하게 ‘English'로 쓰여 눈에 들어온다. 이 땅, 대한민국의 서울 하늘 아래 미군들이, 외국의 강력한 초국적 군대가 멀쩡히 터 잡고 앉은 모습이 가슴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그 곳(미군기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기다란 진압봉을 들고서 두리번두리번 보초를 서고 있다. 왠지 야릇하다 못해 서글프다.
아이들과 천천히 걸어 박물관 정문 앞에 도착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너른 마당에 아이들을 부챗살 모양으로 둥글게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겪었던 시절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주었다.
그러니까 얘기인즉슨, 경복궁은 우리 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으로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궁궐인데,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란 기구를 세웠다. 경복궁의 남쪽, 광화문 안쪽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터인 한양의 경복궁이 남향으로 펼치는 풍수의 기세를 차단하고자 그 기를 막는 의미로 장벽처럼 세워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발복, 발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능멸의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1950년대부터 ‘중앙청’이란 명칭으로 정부에서 사용해 왔으며, 1992년 YS가 집권하면서 ‘우리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의 국책사업을 시작하며 존폐의 논란 속에 철거되었고, 그런 시절을 거치며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늘의 이 자리, 공교롭게도 이곳 용산의 미군기지 터 옆에 새롭게 지어져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사실 나는 1995년 철거를 막 시작할 때쯤 아내와 함께 그곳에 가서 중앙청의 지붕 첨탑-일제 식민 잔재의 대표적 상징표시-이 철거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철거된 첨탑 옆에서 한 장의 역사적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서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넓고 길쭉하게 중앙 홀이 펼쳐보이고, 오른편에는 ‘고고관’이, 왼편에는 ‘역사관’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것처럼 반듯하게 대리석으로 단장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구석기 시대부터 발해까지의 선사 및 고대 유물이 망라되어 전시된 ‘고고관’으로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쪼르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시대별로 순서를 정해 전시해 놓은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물 흐르듯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선사시대의 유물들을 살피며 인상적으로 본 것은 ‘주먹도끼’다. 돌이라는 자연물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서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먹고사는 문제(사냥, 싸움 등)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선배(?) 원시인들의 원초적 삶의 양식을 엿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의 도구요, 창조의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를 감상하며 그 오목한 형태와 기하학적 문양의 오묘함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수많은 석기와 토기, 칼과 화살촉, 장식물과 그림 조각, 짐승의 뼈와 조개껍데기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오래전 시대와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이들과 함께 고구려 시대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고분(古墳)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한 영상물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사신도’는 매우 신비롭고도 화려한 필치를 휘날리며 무덤의 사방을 호위하는 모습이었다. 고구려의 강서대묘를 비롯한 백제의 능산리 고분 등 우리나라 옛 삼국시대 무덤 속에서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사신도는 그들의 신앙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련된 묘사와 화려한 색상, 힘차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모습은 오늘날 가히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적 대가의 작품을 뛰어넘는 회화수준임을 증명해 주는 걸작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매우 뛰어난 금속세공 기술과 디자인 감각을 발견하게 해준 ‘백제금동대향로’의 세련됨은 백제인들의 미학적 세계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신라 왕족의 힘과 권위가 상징되는 금관, 금장식 허리띠, 금귀걸이 등은 신라인들의 첨단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장식예술의 극치였다. 또한, 신라 토우에서 보이는 뜨겁고 대담한 사랑의 표현은 적나라하고 노골적이다. 당시 신라인들의 솔직함과 순수함, 거기에 숨어있는 건강한 쾌락을 볼 수 있으니 유쾌한 에로티시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고관’을 나서니 왕성한 소화력을 가진 몇몇 녀석들은 벌써부터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친다. 이제 겨우 오늘 우리가 관람하기로 한 곳의 반 정도만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이 녀석들의 꿈틀거리는 식욕을 어찌할지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진다.
중앙 홀(역사의 길)의 한적한 곳 맨바닥에 아이들을 앉도록 했다. 그리고선 물이라도 한 모금씩 마실 수 있도록 하며 나는 아이들을 은근히 회유했다. 그러면서 나는 앞서 관람한 고고관의 대표적인 유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아이들의 싱싱한 뇌를 자극하려 했고, 그들의 창조적 상상을 유발하기 위해 큰 소리와 몸짓으로 우스꽝스럽게 오버했다.
나는 아이들을 앉아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저만치 뒤에 우뚝 서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화려하면서도 당당한 직립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 그 어떤 탑보다도 섬세한 조각과 화려함을 가진 이 탑에는 우여곡절도 많다.
그러니까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현재의 개성) 부소산의 경천사라는 절에 있던 탑이었다고 한다. 헌데 1907년 일본의 궁내성 대신 ‘다나카 마쓰아키’가 고종황제가 경천사 탑을 하사했다고 속여 일본으로 빼돌리는 일이 벌어졌고, 이 소식을 알고 탑을 원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여론과 비난이 들끓자 1918년 결국 이 탑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 돌아온 탑은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고, 점차 훼손되어 갔단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탑의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해체하여 보수하기로 하고 대전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2005년 초 보수 보존 처리가 마무리되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성⇒도쿄⇒서울⇒대전⇒서울로 옮겨다닌, 100년간의 떠돌이 생활이 마감될 수 있었다고 하니, 경천사 탑은 아마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노래 가사처럼 중심이 흔들리고, 가슴에 금이 가고, 멍이 들고 그랬을 거란 생각이 밀려온다.
한 숨을 돌리고서 아이들과 함께 건너편에 있는 ‘역사관’으로 향해 들어갔다. 그곳은 우리의 대표적 기록문화인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한 사료적 가치가 큰 문서, 지도 등이 보존되어 우리 민족의 시대상과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불국사 석가탑을 수리하는 과정에 발견되었다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만나는 순간은 몹시 설레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놀라워한다.
우리는 그곳을 조금 지나 금석문이 전시된 공간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기골이 장대하여 거대한 거인 같은 모습으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 온통 벽면에 의연히 서서 그 옛날 광야를 질주하던 고구려의 기상과 힘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활한~ 만~주 벌판,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아~ 벅찬 감동이 나와 아이들 모두에게 하염없이 밀려오는 듯 짜릿하다.
우리는 다시 그곳에 가까이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살피고,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를 만나러 지도를 모아 놓은 소전시실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빠르게 뛰어가듯 움직이니 웬일일까? 하고 나도 궁금증이 생겨 얼른 뒤따라가 보았다. ‘동국전도’를 확대하여 전시실 바닥의 투명 아크릴판 속에 커다랗게 펼쳐 놓은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욕심만큼(?) 넓은 면적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땅따먹기 놀이를 한다. 시쳇말로 그 몹쓸 놈의 “땅”을 아이들도 참 좋아하는지, 그들도 너른 땅을 갖고 싶어 아우성이다. 그렇지만 눈치가 없는 녀석들은 자기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채, 멀리 동해바다 한 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그 녀석은 나중에 부동산 투자에는 도통 재주를 발휘할 수 없을 듯하다. ㅍ ㅎ ㅎ ㅎ
우리는 역사관을 두루 돌아 2층 미술관 전시실 옆에 있는 영상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이들과 오늘 직접 돌아보지는 못하지만, 꼭 중요하게 살피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조선시대의 풍속화”에 대한 짧은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계속 걸으며 이어지는 관람으로 몇몇 아이들은 피곤한지 하품을 하기도 하고, 눈이 희멀거니 풀려 총기를 잃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어찌하랴, 자식에게 맛난 영양가를 듬뿍 주고픈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오늘 답사관람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기왕이면 오래전 유물과 문화재를 통해 우리 역사의 유구한 흐름과 시대적 의미를 골고루 나누어 주고 싶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욕심, 그놈의 욕심이 항상 모두를 피곤케 하고, 불편케 하는 것은 분명 사실인 듯하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진정하고서 아이들과 그냥 편하게, 혹시 졸더라도 ‘조선시대의 풍속화’ 한 편을 보고 가자고 했다. 정조시대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던 ‘단원 김홍도’의 그림의 세계에는 정말 백성의 삶에 대한 철학, 시대를 관통하는 붓의 꿈틀거림이 살아있는 모습이다. 산수화, 풍속화, 인물화를 아우르는 그의 천재적 필치와 예술적 감각은 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한 편 옷고름을 푸는 듯, 아니면 여미는 듯한 묘한 모습으로 묘사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당시 조선 여인네의 농염함과 자태가 매혹적으로 그려진, 조선 미인의 전형적인 얼굴이 아닐까, 상상을 해 본다. 우리는 관념산수화, 실경산수화에 대한 영상을 보았고, 사군자화, 화조도와 영모도, 인물화에 대해 영상을 통한 배움을 한 보따리 얻었다. 때문에 점심은 진작 먹었지만 또한 넉넉히 배부르다.
오늘의 박물관 답사관람을 모두 마치고서 아이들과 2층 외진 공간에 모여 앉았다.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아이들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전부를 돌아보는 일은 애초부터 계획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고고관, 역사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역사와의 즐거운 만남이 되었으니 마음에는 보람이 가득하고, 행복이 잔잔하다.
아이들에게 오늘의 느낌을 넌지시 물었다. 그들에게도 보람 있는 하루가 되었는지 표정들이 왠지 모두 무거워(?) 보인다. 너무나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넣어서 그런 건가? 하여간 아이들은 이내 밝고 활기찬 모습이니, 나는 이제 그들의 손을 꼭 잡고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듯하다.
문화유산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사연과, 곁들여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할 때 더 친숙하고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오늘 우리 문화유산과 유물들의 흔적을 살피고 따라가며 그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생각과 숨결을 더듬어 보게 되니, 그동안 숨죽이며 얌전을 떨었던 내 안의 상상력과 추리력이 대뜸 꿈틀거린다. 자연 속에서 몸으로, 느낌으로 섞여가며 체험했던 바깥에서의 답사여행도 그 묘미가 매력적이지만, 오늘처럼 마치 역사의 미로를 찾아 헤매는 듯한 보물찾기 박물관 탐험도 나와 꼬마 친구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값진 에너지를 채우는 충전소가 된 듯하다.
2007.12.10 20:22 | ⓒ 2007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