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싫증 나거든 무조건 진도로 가 보라!

[남도 여행] 진도를 본 나그네의 진도 예찬론

등록 2007.12.13 18:35수정 2007.12.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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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를 건너 벽파진을 갈 때만 해도 진도가 좋은 줄 몰랐다. 그러나 용장리를 가기 위해 길을 좀 헤매다 마을 길로 접어들고 나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배추밭을 보고 놀랐다. 배추밭뿐인가, 구불구불 이어진 들길과 낮은 언덕은 또 어떻고. 아니, 무슨 섬이 들이 이렇게 넓어! 그리곤 내내 탄성을 질렀다.

 

아깝게 놓친 건 세방 낙조. 가물가물 구름 속을 넘나들던 해가 그래도 마지막은 장식해 줄줄 알고 기다렸건만 끝내 감감무소식 구름 속으로 쏙 숨어버렸다. 그날따라 구름이 많아 세방 낙조 가는 길에 만난 가치리 바닷가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방 낙조 부근에서 민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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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리 바닷가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기괴하다. ⓒ 이현숙

▲ 가치리 바닷가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기괴하다. ⓒ 이현숙

점심을 과하게 먹은 고로 저녁은 약소하게 라면으로 때울 작정이었는데, 미처 라면을 사지 못한 것. 급한 대로 민박집에 물었더니 라면을 그냥 주겠단다. 그러나 그럴 수야, 돈을 내면서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내리며 물었다.


"혹시 파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파요. 조기 밭에서 뽑아 드릴게요. 그러면 김치도 좀 드릴까요? 열무김치가 있는데."
"주시면야 잘 먹죠."

나는 헤벌쭉해서 덥석 받았다. 언감생심 요즘 세상에 파 한 뿌리 얻기도 힘든데 김치까지!

 

사실 우리 형편에 여행경비는 꽤 부담이다. 그렇다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곳에 와서 소문난 집 음식을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그래서 오늘은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우리가 남긴 김치와 젓갈을 종이컵에 챙겼다. 요즘은 음식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남긴 음식 싸가는 것 정도는 너그럽게 봐 준다. 그러나저러나 진도의 인심에 반해 저녁은 기분 좋게 먹고 정말 새까만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가치리로 가서 바닷가를 찍고 팽목항으로 이동이다. 본래는 관매도를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관매도는 하루에 배가 한 번만 뜬단다. 포기하는 대신 팽목항만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팽목항 가는 길이 정말 아름다웠다. 우선 진도는 산의 모양이 기묘하다. 가치리도 그랬는데 저수지가 있는 마을에서 보는 동석산도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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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풍경들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마사리 마을, 동석산 아래 들판, 그리고 그 아래에서 만난 버스 길, 팽목 방조제 옆 풍경... ⓒ 이현숙

▲ 길에서 만난 풍경들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마사리 마을, 동석산 아래 들판, 그리고 그 아래에서 만난 버스 길, 팽목 방조제 옆 풍경... ⓒ 이현숙

저수지 둑밑을 걷는데 눈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서 시외버스가 달려온다. 어린 시절 시골길에서 버스 기다리던 때가 생각나 무턱대고 반가웠다. 버스가 지나가자 우리도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고 마사갑문이 나왔다. 마사갑문 뒤로 길이 계속될 줄 알고 앞으로 나가는데 길 끝. 다시 차를 돌려 마사갑문을 통과해 팽목방조제 위로 달렸다.

 

팽목방조제 양쪽 풍경도 장관이다. 한쪽은 바다요, 한쪽은 갈대가 무성한 수로 너머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러니 들노래가 다 유명하지. 새삼 진도의 진면목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 삼별초가 이 들판을 믿고 진도를 근거지로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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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관매도 가는 배가 떠나는 팽목항. 파도가 심해서 바닷물이 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 이현숙

▲ 팽목항 관매도 가는 배가 떠나는 팽목항. 파도가 심해서 바닷물이 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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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망항 서망항과 서망 해수욕장... ⓒ 이현숙

▲ 서망항 서망항과 서망 해수욕장...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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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국악원 남도 국악원과 그 앞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 ⓒ 이현숙

▲ 남도 국악원 남도 국악원과 그 앞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 ⓒ 이현숙

팽목항은 파도가 거세 물길이 아예 뒤집혔다. 바닷물이 누렁색이었다. 바다를 끼고 달려 닿은 곳은 신비의 바닷길.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 관광자원의 1등 공신이 아닌가 싶다. 2월 그믐 사리 때 바닷물이 급격히 빠져나가 '회동리 뿔치와 모도리 뿔치' 사이에 뻘길이 열리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인데, 뻘길은 고작 한 시간 정도 열린다고.

 

뽕 할머니 동상 앞에서 신비의 바닷길을 바라보니 천길 물속 같다. 저 물길이 열린다니 정말 신비하긴 하다. 난 신비도 좋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싫어 그 현상을 내 눈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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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해양생태관 신비의 비닷길 옆에 있는 진도해양생태관 ⓒ 이현숙

▲ 진도해양생태관 신비의 비닷길 옆에 있는 진도해양생태관 ⓒ 이현숙

이 바다의 수심은 평소 5미터 정도. 그런데 물이 빠지는 속도가 빨라 갑자기 바다에 길이 나타난 것 같다나. 그래서 사람들은 경이감에 사로잡히고 길이가 2,8km나 되는 길을 걸어서 건너간다. 폭도 40m나 된다니 놀랍기는 하다. 폭도 넓고 길이도 오리가 넘는데 단번에 열려 한 시간 만에 다시 바닷물로 메꿔진다니.

 

더구나 이 뻘길은 바닥이 단단해서 발이 빠지지도 않는다는데 정말 대단한 신비라고 여겨진다. 과학적으로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지만 자연과학 그 자체도 때론 신비일 수 있는 것. 여기에 뽕할머니 전설이 슬며시 끼어든다.

 

옛날 회동마을에 호랑이들이 들끓어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가재도구와 가축들을 배에 싣고 앞 섬인 모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웬일인지 뽕할머니를 모시고 가지 않았다. 혹시 할머니가 배멀미라도? 암튼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마을에 혼자 남게 된 뽕 할머니는 사람들이 그리워서 용왕께 빈다.

 

그러자 용왕이 꿈에 나타나 2월 그믐 사리 때 무지개를 바다에 내릴 테니, 무지개를 밟고 섬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용왕이 말한대로 2월 그믐 사리가 되자 뽕할머니는 바닷가에 나가서 섬 쪽을 바라보고 울면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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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바닷길 신비의 바닷길에서 만난 뽕할머니와 모도 섬. ⓒ 이현숙

▲ 신비의 바닷길 신비의 바닷길에서 만난 뽕할머니와 모도 섬. ⓒ 이현숙

그러자 바다가 갈라지고 뻘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기력이 쇠약해진 할머니는 건너갈 수가 없었고, 먼저 섬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이 뻘길을 따라 꽹과리를 치며 건너왔다. 할머니를 구하러. 하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는 자신은 안전한 섬에 가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기도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여한이 없다는 화해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할머니의 동상은 여전히 저 먼 섬을 향해 그리움을 담은 눈길을 보내고 있는데….

 

신비의 바닷길을 떠나 진도의 금강이라 일컫는 금골산으로 갔다. 우리가 간 곳은 정확히 금골산 5층 석탑이 있는 금골산 자락 금성초등학교 교정. 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봐도 산은 기괴하다. 산 능선이 모두 크고 작은 바위로 이어져 날카롭고도 장대한 형세. 이 산에도 한 인물이 관련되어 있으니, 그는 '이주' 라는 조선 연산군 시대의 문신이다.

 

그는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진도에 유배,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고 죽었다. 진도로 유배를 와서 세상이 아닌 곳(금골산 꼭대기의 석굴)으로 숨어들었다가 23일만에 세상으로 내려왔지만 끝내 세상이 그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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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골산 능선이 바위로 이어진 금골산과 마을. 산 아래 금성초등학교도 보인다. ⓒ 이현숙

▲ 금골산 능선이 바위로 이어진 금골산과 마을. 산 아래 금성초등학교도 보인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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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골산 5층석탑 금골산 5층 석탑(보물 제 529호)은 금성초등학교 안에 있다. ⓒ 이현숙

▲ 금골산 5층석탑 금골산 5층 석탑(보물 제 529호)은 금성초등학교 안에 있다. ⓒ 이현숙

진도는 고려 중기에서 조선조 말까지 왕족과 선비들 50여 명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진도는 다른 섬 같지 않은 포근함으로 유배된 사람들에게도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섬이지만 농토가 많아서인지 편안하고 풍요로운 곳 진도. 풍광은 수려해 그런지 예술이나 문화적으로도 중앙 못지 않은 저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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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아리랑 노래비 첨찰산 밑에 있는 진도 아리랑 노래비 ⓒ 이현숙

▲ 진도 아리랑 노래비 첨찰산 밑에 있는 진도 아리랑 노래비 ⓒ 이현숙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은 진도라는 유토피아는 나에게 색다른 황홀감을 안겨 주었다. 고작 1박 2일의 짧은 여행에서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내 삶이 싫증나거나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가 나를 애타게 불러 낸다면 지체없이 달려와 한 일주일 머물면서 곳곳을 풀어헤쳐 진도를 한 번 제대로 즐기다 가겠노라고.

2007.12.13 18:35 ⓒ 2007 OhmyNews
#진도 #팽목항 #신비의 바닷길 #금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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