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쇠망치 소리...서울에 있는 대장간 마을

[미니벨로 타고 서울 골목여행9] 신당동, 재래시장과 성벽이 어우러져

등록 2007.12.18 11:28수정 2008.01.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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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1동과 신당5동에 전통 골목길이 남아 있다. 사진은 신당5동. ⓒ 조정래


서울시 중구에 있는 신당동은 여러 가지로 유명한 게 많다. 가수 DJ DOC가 부른 노래 '허리케인 박'의 무대가 신당동이고, '왕십리 곱창골목'으로 유명한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이 이곳에 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10여 개나 되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대장간 거리 또한 신당동에 있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연합이 91년 생활용품 재활용 활성화를 위해 만든 알뜰가게가 처음 문을 연 곳 또한 신당동이었다. 재활용 가게로 유명한 '아름다운 가게' 1호점(안국점, 2002년 개장)이 생기기 11년 전이었다.


신당동은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종필 김형욱 등 영관장교들과 함께 쿠데타 계획을 짠 곳이 신당동 자택이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아버지 사후 청와대에서 나와 머무른 곳 또한 이 동네다. 최근 정치 재개를 한 전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자택이 있는 곳 또한 신당동이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97년 서울 구기동 주택을 팔고 신당동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으니 신당동과 정치인과의 인연은 적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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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1동 주택가. 멀리 동대문 상가가 보인다. ⓒ 김대홍


정치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락의 대부' 신중현이 1938년 이 곳에서 태어났고, 70년대 전 국민을 흥분케 했던 프로레슬러 김일이 결혼한 뒤 이 곳에서 살았다. 또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22살 때 '경일상회'라는 이름으로 첫 사업(쌀 도산매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지금껏 세간에 오르내리는 여러 인물들이 이 곳에 둥지를 틀고 있거나 틀었었다.

신당동은 서울 사대문 성벽에 붙어 있는 바깥 마을이었다. 사대문 동쪽 문이 흥인지문이었고, 그 아래 동남쪽에 광희문이 있다. 광희문은 도성에서 사람이 죽을 때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었기 때문에 속칭 시구문(屍口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광희문 바로 바깥쪽 마을이 신당동이다.


10여 년 전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배네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산 쪽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갔더니 두 사람이 간신히 몸을 눕힐 만한 조그만 방에 선배가 살고 있었다. 그 동네가 바로 신당동이었다. 당시 가진 것은 맨몸밖에 없는 20대 청년이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절절함을 그 방에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사대문 밖에 붙어 있는 마을, 사대문이 서울이던 시절, 서울에 가장 가까웠던 변두리. 신당동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위치 탓에 신당동은 오랫동안 낡은 마을로 남아있었다. 지금은 많이 재개발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신당1동과 신당5동엔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12월에 세 차례에 걸쳐 신당동을 찾았다. 출발지는 동대문운동장역 3번 출구 건너편 광희문이다.


"골목이 워낙 넓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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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동대문운동장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 김대홍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성곽 8문 중 하나가 광희문이다. 동서남북에 큰 문이 하나씩 있고, 그 사이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광희문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있었던 동남쪽 문이다.

광희문엔 서울성곽이 복원돼 있다. 태조 5년인 1396년 서울 성곽 길이는 약 5만9500척으로 17km 정도였다. 1975년 복원 당시 측정한 길이는 18km 정도로 조선 초기 당시와 큰 차이는 없었다. 광희문에 붙어 있는 동네가 신당1동이다. 신당1동에 옛 골목길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광희문길 골목이 무척 아기자기하고 변화가 심한 편이다. 골목이 좁아 자전거를 끌고 다니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나오면 후진하거나 한 쪽으로 바짝 붙어야 했다. 한 아주머니를 보고 근처 벽에 바짝 붙어 있었더니, 아주머니께선 "골목이 워낙 넓어서…"라며 웃으셨다. 

대추나무길 골목도 무척 좁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폭이다. 단 광희문길이 미로처럼 복잡하다면 대추나무길은 일자형이다. 골목이 보여주는 아기자기함은 떨어진다.

이 곳 골목에서 사진을 찍을 때 몇 번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마다 나온 첫마디는 "재개발 때문에 찍느냐"였다. 혹시나 사진을 어디 이용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눈빛이 묻어났다. 이런 질문을 재개발 지역을 찍으면서 몇 번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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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선 빨랫줄을 많이 볼 수 있다.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빨랫줄이다. ⓒ 조정래


이런 재개발 동네를 다니면 부서진 문을 테이프 등으로 대충 막아놓은 곳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곧 떠나갈 곳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붙여놓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 편이 편치 않다.

신당1동 골목길에도 계단이 많다. 자동차가 다닐 만한 길에서 민가가 있는 주택가로 들어갈 때는 꼭 계단이 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계단이 꼭 자동차를 막는 근위병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 계단에 대해서는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의 저자 황인숙이 훌륭하게 표현해놓았다.

"계단은 아이들에게 즐거운 구조물이다. 계단으로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다닐 수 없다. 계단 길은 보행자를 위해 각별히 공들여 만든 길이다. 계단은 배려이며 초대이며 유혹이다. 한없이 뻗어 있는 계단을 보면 칸칸이 층층이 그 계단을 딛고 올라오시라는 신호를 받는 느낌이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우에게는 계단이 높고 힘겨운 턱일 따름이다. 의자처럼 걸터앉기 딱 좋은 그 계단 턱에서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어떤 이들은 숨을 고른다."

한 때 대장간 160여 곳 성업...지금은 10여 곳 정도만 명맥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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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동에 있는 한 대장간. 대장간 안에 가마도 있고, 모루도 있다. ⓒ 김대홍


신당1동 골목길을 구경한 뒤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도로가에 있는 대장간 거리다. 광희문에서 신당역으로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대장간 세 곳이 있고, 길 건너편 한양공고와 성동여자실업고 사이에 대장간 여섯 곳이 있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 83화 '대장간의 하루'의 배경이 바로 이 곳이다.

그 곳 대장간 주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이 곳 대장간은 한 때 160여 곳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 때는 화덕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모루 위에 놓고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로 요란했을 것이다.

이 곳 대장간은 오전 7시쯤이면 이미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은 농사꾼들을 닮았다. 저녁 해가 진 뒤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만 쉰다. 대부분 주인 혼자 아니면 부부가 일을 한다. 일을 하려는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 주인은 "일하러 와도 채 3개월을 버티지 못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이 곳 대장간 거리는 오래지 않아 대가 끊어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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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하얀집. 신당5동에서 ⓒ 조정래


대장간 거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신당역 3번 출구를 지난 뒤, 성동고등학교에서 무학봉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면 신당5동이다. 여기에도 옛 모습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후배 정래와 함께 찾아간 어느 일요일 그 곳에선 유난히 아이들 웃음소리가 많이 들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웃음소리였다. 아이들이 더 이상 뛰어놀지 않는 골목길, 골목이 삭막하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더 이상 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곳 아이들은 몇 십 년 놀이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계단과 전봇대를 이용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고, 스티로폼을 비벼 눈 날리기를 하고 있었다. 옥상에서 줄넘기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 한 아이들 무리는 음료수병을 누른 뒤 발로 차면서 놀았다. 신당5동 골목길이 유난히 경쾌하게 느껴진 이유는 오로지 아이들 덕분이었다.

신당5동 미용실이 독특하다. 보통 집과 다를 바가 없는데, 간판만 하나 달랑 붙어 있었다. 다른 미용실은 '파마전문'이라고 창문에 붙여 나름대로 홍보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한 군데는 '선미용실'이고, 한 군데는 '영미용실'이다. 이름이 비슷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매가 운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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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5동엔 유난히 스쿠터가 많다. 오르막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 조정래


신당5동 언덕길 끝까지 올라가면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보이고, 왼쪽이 차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경계표지판을 하나 볼 수 있다. 어느 집 담에 왼쪽이 '중구', 오른쪽이 '성동구'라고 표시돼 있다. 표지판만 보면 집 절반은 중구, 절반은 성동구로 보인다. 이 길에 있는 집들 주소엔 모두 지자체 표시가 돼 있다.

대부분 집들은 '인사동' '낙원동' '방배동' '신사동' 하는 식으로 동 이름만 나온다. 그런데 여긴 집 주소 간판 절반을 아래 위로 나눠 위엔 '중구', 아래엔 '신당동'이라고 돼 있다. '중구 신당동 00' 하는 식이다. '중구'라고 못박아놓지 않으면 성동구에 뺏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느껴서일까.

신당5동엔 가게가 무척 많은 편이다. 길 하나 돌 때마다 가게가 보인다. 자동차를 타고 할인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게 다반사가 된 요즘 동네 가게는 설 자리가 줄고 있다. 신당5동에 가게가 많다는 것은 주민들이 동네에서 물건을 많이 산다는 뜻일 것이다.

신당동 떡볶이 거리, 자동차 없이 오면 더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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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동 떡볶이 타운 ⓒ 조정래


어느덧 저녁이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탄 거리는 대략 18km. 자전거에서 내려서 걸은 거리도 10km 정도는 된 듯하다. 사진을 찍는 정래가 아무 불평 없이 버티고 있는 것은 신당동 떡볶이 맛을 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이제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정래가 웃는다. 그런데 한 마디 덧붙였다. "아마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비벼주는 떡볶이에 길들여졌다면 아마 실망할 지도 모른다. 그 곳은 꽤 큰 식당 거리거든."

도대체 어디가 원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원조거리와 달리 신당동 떡볶이 거리에서 원조는 단 한 곳이다. 그 옛날 해찬들 고추장 CF에서 "며느리도 몰라"라는 유행어를 남긴 마복림 할머니가 차린 떡볶이 집이 바로 원조다. 53년에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인근엔 막내아들이 낸 또 다른 떡볶이집까지 있다.

거리는 10여 년 전 왔을 때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일명 '삐끼'들이 골목이 떠나갈 듯이 호객 행위를 한다. "자전거도 파킹됩니다. 저희 집으로 오세요." '삐끼'들의 목소리와 골목을 가득 메운 자동차 엔진소리로 요란하다. 복잡한 길에 자동차 여러 대가 한꺼번에 움직이니 길이 비좁다. 자동차를 몰고 온 사람이나, 걷는 사람이나 이래저래 불편하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기대한 정래의 표정에 실망감이 스친다.

우리는 건너편 중앙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중앙시장엔 갈래 길마다 먹거리집이 잘 발달돼 있다. 입구에선 잔치국수를 팔고, 갈래 길에선 보리밥을 판다. 입구는 왕십리 곱창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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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 서울의 대표 재래시장 중 한 곳이다. ⓒ 조정래


시장 내에 펼침막이 붙어 있다. 2004년 11월 30일 현대화 사업을 했으니 앞으로 10년간은 재개발 혹은 다른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내용으로 서울중앙시장운영회와 서울중앙시장건물주협의회가 붙였다.

중앙시장 앞과 옆으로 가구거리, 공구거리, 가전거리 등이 붙어 있다. 안 파는 게 없다. 지금껏 TV, 비디오,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모두 이 곳에서 중고로 구했다. 중앙시장 일대를 한 바퀴 돌고 시장에서 잔치국수를 먹었다. 아저씨가 푸짐하게 말아주신다.

자전거를 타고 을지로를 달리다 종로4가에서 배오개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광장시장으로 들어갔다. 1905년 세워진 광장시장은 국내 최초 상설 시장이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엔 특정한 날에 열리는 비상설 시장만 있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경제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김종한 외 3인이 현금 10만원을 각출해 세운 곳이 바로 광장 시장이다. 광장시장 한 복판엔 먹거리촌이 있다. 한 가운데가 빈대떡을 파는 곳이고, 근처에 대구탕, 생선회를 파는 곳 등이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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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광장시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 ⓒ 조정래


여기서 정래와 빈대떡을 나눠 먹었다. 우리가 먹은 곳은 황해도 할머니가 빈대떡을 만들던 집이다. 근처 충청도만 빼놓고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지방 식당이 보였다. 여러 지방이 광장 한 가운데를 중심에 놓고 도열해 있다. 막걸리도 한 잔 걸쳤다. 여기서 자전거를 끌고 을지로 4가 입구까지 가면 시청역까지 이어진다. 시청역에서 동대문운동장역까지 약 4km 가까이 지하보도가 이어져 있다.

빈대떡 한 장을 나눠먹고 길을 빠져 나오는데, 어느 곳에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정래에게 빈대떡 한 조각을 내민다. 얼떨결에 빈대떡 한 조각을 얻어먹은 정래가 싱글거린다. 재래시장이 좋은 이유는 이런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골목도 마찬가지다. 꼼꼼히 살피다보면 골목 어디엔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골목 전체가 보물일지도 모른다.
#골목 #신당동 #자전거 #미니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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