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뒷골목에 피어난 예수 그리스도 같은 꽃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160] 국화

등록 2007.12.23 16:04수정 2007.12.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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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천동 어느 골목 흙을 잃어버린 도시 한구석 화분에서 지고 있는 국화

마천동 어느 골목 흙을 잃어버린 도시 한구석 화분에서 지고 있는 국화 ⓒ 김민수


겨울은 겨울이다.
영상의 기온이라고 하는데도 햇살이 구름에 가려있으니 작은 바람만 불어와도 소름이 돋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가 살고있던 마천동 산5번지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마천시장에서 마천동 산5번지가 시작되는 초입에서 달음박질 쳐 골목길을 따라 20여분간 올라가면 마천동 산5번지 꼭대기까지 넉넉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금 더 올라가면 아직도 남아있는 산의 윗자락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그때는 산5번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랐다. 광주대단지 사건이후 거여동으로 밀려들어온 이들에 대한 의미도, 지금 가락시장 앞에 있었던 평화촌의 의미도 몰랐다.

a 거여동 어느 골목 좁고 을씨년스러운 골목길 화분에 피어있는 국화

거여동 어느 골목 좁고 을씨년스러운 골목길 화분에 피어있는 국화 ⓒ 김민수


어른이 되어서야 '산5번지'와 '달동네'가 같은 말이라는 것도 알았고, 평화촌이 판자촌과 다른 말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마천동 산5번지는 많이 변했다. 여전히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들이 이어져 있었지만 거의 꼭대기까지 일방통행길들을 따라 차들이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었다.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아랫동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시절 기억에 남을 만한 골목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별다른 추억의 그림자를 찾지 못하고 내려와 마천동과 접하고 있는 거여동으로 향했다. 살기 좋은 곳 상위권으로 소문난 송파구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은 강남의 구룡마을이 남아있는 것처럼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곳은 참 이상했다.
재개발지구로 선정이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시절 그 모습 그대로 보수됨없이 점점 낡아만가고 있었다.

a 거여동 어느 골목 한기가 스며들것 같은 갈라진 담벼락에 기대어 핀 국화

거여동 어느 골목 한기가 스며들것 같은 갈라진 담벼락에 기대어 핀 국화 ⓒ 김민수


골목의 집들은 낡은 옷을 깁듯이 낡은 그대로 하나하나 덧붙여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 그렇게 넓게 보였던 골목길은 혼자 걸어가기에도 좁은 골목길이 되어버렸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터진 후 철거민들이 몰려들면서 콩나물시루 교실도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끝번호가 거의 60번이 훌쩍 넘어갔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돈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가장 많이 했던 것 중 하나가 신문돌리기와 여름 한 철이지만 아이스케키장사였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신문돌리는 친구를 따라 골목길을 누비며 신문을 돌리기도 했었다. 아마 일주일 정도 하고 그만 두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내가 사는 동네는 그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웃동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보다 사정이 더 나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곳에 사는 아이들과 동질감을 느꼈고, 중고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그 곳에 살았으니까.

골목길 사진을 찍어 돌아와 화일을 열어보니 몇몇 사진에 국화가 들어있다.
'내 누님 같은 꽃이여!' 노래가 나올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두운 골목길, 갈라진 담벼락에 기대어 겨울을 나고 있는 국화는 마치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듯 했다.

a 거여동 어느 골목 때론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슬플 때가 있다.

거여동 어느 골목 때론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슬플 때가 있다. ⓒ 김민수


거리마다 네온사인과 성탄트리가 넘쳐나고 캐럴송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오는 그 곳에는 성탄 트리도 없고, 캐럴송도 없다. 여전히 2천년 전 마굿간, 아니 그보다도 더 초라해진 그 곳에서 아기 예수는 오돌오돌 떨고 있는데 아기 예수도 없는 곳에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의 탄생을 빌미로 온갖 상업적인 상술들이 판을 치고, 자기들만의 축제에 빠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오히려 더 쓸쓸해지는 그런 성탄절이 된지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무감각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아니라 부자들과 가진자들과 대형교회의 치장품이 되어버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오시는 예수는 이제 빨갱이, 급진좌파 혹은 종교다원주의자로 낙인찍혀 더 이상 발 붙일 곳이 없다.

a 거여동 어느 골목 벽에 붙은 광고물, 권투도장 광고물이 눈에 띈다.

거여동 어느 골목 벽에 붙은 광고물, 권투도장 광고물이 눈에 띈다. ⓒ 김민수


어릴 적 동네에는 권투도장이 유난히 많았다.
가난한 동네에 권투도장이 많은 이유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돈줄이나 있고 먹물이 들어간 이들이 건강을 위해서 권투도장을 찾는 일이 얼마나 될까?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 눈물 젖은 빵을 매일 먹어야만 했던 이들이 한 순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권투도장이 아니었을까?

골목길에서 만난 국화, 한 겨울에도 아직 목숨 살아있어 모질게 살아가고 있는 국화를 보며 나는 아기 예수를 본다.

그들이 있어 골목길이 한 때는 아름다웠을 것이며, 골목길에 피어서도 여느 부잣집 정원에 핀 꽃과 다르지 않게 피었을 것이며, 그 골목길에 사는 그 누군가의 마음에는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니 꽃과 사람이 하나되어 잠시라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던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뒷골목 화분에 피어나 이 추운 겨울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그래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국화는 아기 예수를 닮았고,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닮았다.
#골목길 #국화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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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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