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우리 동네 우체부 아저씨①

2007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한 우체국의 뒷모습

등록 2007.12.28 18:53수정 2007.12.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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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나오는 우체부 아저씨는 대부분 '착하다'. 아니 '선하다'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이겠다. 계단을 수백 개를 올라야 겨우 닿는 이른바 판잣집으로 배달된 편지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기꺼이 발품을 판다. 땀에 옷이 젖어 축축할 텐 데도, 손등으로 이마를 쓱 쓸어 내리곤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뭐라도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순박한 얼굴로 답한다. "그냥 시원한 물 한 잔만 주세요."

그 모습만 보면, 세상에 이보다 더 착할 사람은 없어 보일 정도다. '우체부 아저씨', 이 이름엔 그래서 훈훈한 정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도 애정이 한껏 뭍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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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식의 '우체부 아저씨' ⓒ 정준식, 진주피카소교육원



하지만 '꿈깨라'.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 다르다. '백'이면 '구십'은 현실은 정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그랬다. 확실히.

우체부 아저씨 S씨(서울 동작구)를 만난 건 대략 지난 여름부터다.


"우체국인데, 내려와요."

모르는 번호가 뜨기에 조심스레 받은 전화, 돌연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놀라 다시 물었다.

"어디요? 어디신데요?"

이어지는 그의 대답. "우체국이라니깐!" 간단했다.

놀라기도 했지만, 기분도 살짝 나빴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툭 자기 할 말만 하는 그놈이 괘씸했다. 마침 집에 있던 터라 밖으로 나갔다. 4층에서 슬리퍼만 대충 신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현관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S였다. 그와 얼굴을 맞대고 말을 섞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S는 다시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얼굴은 잔뜩 붉어져서는.

"아니, 현관문을 열어놔야지 배달을 할거 아니야. 이렇게 카드키로 잠가 놓으면 등기는 어떻게 배달하라고. 잠그려면 나한테도 카드키를 그냥 주라니까."

뭔 이런 황당한 경우가 또 없었다. 초면에 반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언제 봤다고 카드키를 달라고 소리를 생뗀지. 상황을 잘 몰라 일단 대강 들어주는 척만 하고 물건을 받고 방으로 올라왔다.

누나에게 물어보니 상황은 이랬다. 문제는 등기 편지나 소포인 듯했다. 한 건물에 5가구가 모여 살기에, 등기 우편이 오면 직접 전달해야하는데, 현관문이 잠겨있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는 "현관 카드키를 달라"고 했지만, 주지 않자 자주 짜증을 냈다고 했다. 이 문제로 집배원 아저씨와 몇 번 실랑이도 벌인 듯했다.

카드 한 장이면 끝날 문제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지난 1년 새, 우리 집을 포함, 같은 건물에 도둑이 3차례나 들었다. 5가구에 3가구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사이에 물건만 가져가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 집안을 뒤졌다는 찝찝함과 혹시 다시 올 지도 모르는 불안감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도둑 맞은 집 가운데는 여자들끼리 사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5가구가 모여 생각해낸 것이 '카드키'였다. 전에는 현관에 아무 장치가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물론, '카드키'를 설치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음이라도 편하게 사람이라도 통제하자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사연 많은 '카드키'이기에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최대한 조심했다. 조금이라도 기계가 이상이 있으면, 당장 열쇠집에 전화해 다음 날 바로 바꿨다. 누나는 "그래서 아무리 우체부 집배원이라고 해도, 선뜻 주기가 꺼려졌다"고 했다.

S씨는 편지를 배달하러 올 때마다 "불편하다"며 입을 삐죽댔다. 한번은 똑똑히 보라는 듯 카드키 뭉치를 보여주며 "이봐요. 다른 집은 이렇게 다 주는데, 왜 유독 그래"라며 으름장을 놨다.

그래도 주지 않자 S씨는 급기야 '막가파'로 돌변했다. 등기 우편물이 있으면 겉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달라고 하자, 전화를 하되 '상냥함'은 완전 버리기 초식으로 일관해왔다. 자기가 누군지, 집에 사람이 있는 지도 확인하지 않고, "우체국이요, 나와요"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28일)도 집 현관문에 '노란 딱지'(등기 우편물을 직접 받지 않으면 언제 다시 온다고 알리는 일종의 안내문)가 붙었길래, 황당해서 전화해보니 "~까지 나와서 받아가라"고 하질 않나. 직접 나가서 우편물을 찾을거면 우체국이 배송료를 받을 이유는 없다. "적어도 전화 한 통은 해야하지 않냐"고 물으니 "전화번호를 몰랐다"고 둘러대고, 하나씩 따질려고 했더니 급기야 "○○○씨!!! ○○○씨!!"라며 딴청을 피우기까지 했다.

너무 기가막혀서, 오늘은 동작 우체국 집배실장과 통화를 했다. 알아 보고 오후에 연락을 준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 분(S씨)이 팀장님이라 그럴 분이 아니다. 성실한 분이 그럴 정도면 오죽 성질이 나셨겠느냐"라고 두둔하는 걸 보니 사실 썩 믿음은 가지 않는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 정말.

영화 속에서 나오는 진짜 친절한 우체부 아저씨를 기대하는 건 '무모한 도전'인가. 얼마 전 우체국 택배가 올해 고객만족도 1위를 했다는 기사를 봤다. 공공 서비스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개뿔이." 고객을 만족시키는 우체국이라면, 배달이 불편하다고 짜증내기 전에, 세대 주민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애써야 했다. 서서히 친근함으로 다가와 믿음을 얻는 게 당연히 먼저다. 내 집 열쇠를 믿고 맡길 만큼, 든든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카드키를 못내어줄 이유는 없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써 6개월째다. 이젠 얼굴 보는 것, 목소리 듣는 것조차 싫다. 우체국이 어떻게 대응할 지 지켜봐야겠다. 고객만족도 1위에 부끄럽지 않을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집배원 아저씨 #동작우체국 #집배원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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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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