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쟁이들과 어울리는 즐거움

'취안'으로 미술작품을 봅니다

등록 2007.12.31 10:35수정 2007.12.3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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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살면서 지역미술단체들의 미술작품전시회를 즐겨 관람하는 편입니다. 우리 지역(충남 태안)에도 미술협회(한국미협 지부)를 비롯하여 세 개의 미술단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예단체와 사진단체가 두 개씩 있고, 서각(書刻)협회도 있습니다.

미술의 모든 장르와 사진예술이 함께 하는 '문화원초대전'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일년에 한 번씩 있고, 미술협회를 비롯한 모든 단체들이 일년에 한 차례씩 전시회 행사를 갖습니다. 초대전과 협회전, 그룹전들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열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모든 전시회들을 일일이 찾아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많이 '성실하게' 관람을 하지 싶습니다. 나는 미술작품 감상을 즐기는 편이고, 미술작품들을 대하는  내 나름의 '감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는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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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서각협회 창립전 한국서각협회 충남지회 태안지부 채태선 회장과 함께, 그의 작품 앞에서 ⓒ 지요하


그동안은 미술작품들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따라 자발적으로 전시회장을 찾곤 했습니다만, 최근에 태안예총 회장이라는 감투를 썼으니, 이제부터는 거의 의무적으로 전시회장들을 빼놓지 않고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의무'라는 말이 결부되는 사정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부담감 같은 것도 작용은 하겠습니다만, 그렇더라도 미술작품 감상을 즐기는 성격, 자신의 취향이나 성향을 스스로 확인하고 즐기는 습성은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 우리 지역의 예술계에는 뚜렷한 명암이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태안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제75회 충남미협전과 제2회 태안미협전은 충남미협과 태안미협이 처음으로 함께 한 매우 의미 있고 규모 있는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11월 9일부터 16일까지 역시 태안문예회관에서 열린 한국서각협회 태안지부 창립전은 우리 지역에도 서각인들이 다수 존재함을 알리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충남미협·태안미협의 합동전과 서각협회 창립전을 비롯하여 12월 이전의 미술 행사들이 밝은 색채를 띠는 쪽이었다면, 12월에 있은 두 번의 미술작품 전시회는 아무래도 어두운 색조를 띠는 쪽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태안신용협동조합 전시실에서 열린 '태안군중등미술교육연구회'의 제13회 '밀물과 썰물전', 그리고 22일부터 어제 28일까지 태안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제13회 '샘골스케치전'은 7일 고장의 바다를 덮친 검은 기름재난으로 말미암아 자연 어두운 색조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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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협회 창립전 11월 16일 태안문예회관 전시실에서 태안서각협회 회원 작가들과 함께 ⓒ 지요하


두 행사 모두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전시회를 열자니 지역사회에 미안하고 눈치 보이는 면도 있고, 포기를 하자니 작가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온 작업이 너무 아깝고…. 고심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조용히, 조심스럽게' 행사를 치르는 쪽으로 겨우 가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밀물과 썰물회', '샘골스케치회' 두 미술 단체는 초대장을 교육장과 문화원장 등 관련 기관장을 제외한 주요 공직자들과 단체장들에게는 아예 보내지도 않고, 전시회장 밖의 알림 현수막도 작게 만들어 거는 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조금은 은밀할 정도로 2007년의 전시회를 여는 그들을 보자니 안쓰러움과 함께 억울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더군요.

<2>

나는 다소 독특한 감상법으로 미술작품들을 봅니다. '맨정신'으로 그림들을 보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술작품들을 볼 때는 술을 좀 마십니다. 술을 좀 마시고 약간의 취기를 느끼며 느긋하게 미술작품들을 보면 확실한 감흥을 얻습니다. 그래서 종래는 "미술작품은 '취안(醉眼)'으로 봐야 한다"는 지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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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협회 창립전 서각협회 창립전 마지막날, 전시회장에서 고장의 서각쟁이들과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 지요하


정말 나는 취안으로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내 색다른 지론을 주위 사람들에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는 미술작품들에서 얻는 감흥도 좋지만, 취안으로 느긋하게 그림을 보는 내 취향 자체를 또한 즐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단순한 관람 태도에서 야릇한 반감 같은 것을 갖습니다. 바쁜 세상을 바쁘게 사시는 분들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미술작품들을 마치 사열이나 하듯이 전시회장을 한 번 쓱 도는 식으로 잠깐 머물다가 가는 분들을 보면 그림쟁이도 아닌 내가 더 섭섭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미술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그림쟁이들이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들인 고심과 시간과 공력을 함께 느낍니다. 저 작가는 저 작품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마나 시간을 들이고 공력을 들였을까? 어디를 찾아갔고, 비용은 얼마나 들였을까? 저 그림으로 그는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또 그가 저 작품으로 얻는 현실적인 보람은 무엇일까? 그리고 정신적 보람의 실체는 뭘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마움도 느끼고, 공연한 의문도 갖게 되고, 안쓰러움도 안게 되고, 그러다 보면 또 행복한 슬픔도 누리게 됩니다. 사실은 행복한 슬픔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미술작품 전시회장을 찾고, 또 취안으로 미술작품들을 보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취안으로 미술작품들을 보기 위해서 미리 술을 마시고 전시회장을 찾은 적은 없습니다. 미리 취한 상태로 간 적은 한 번도 없고, 전시회장에서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술을 마십니다. 전시회장에서 얻은 취안으로 미술작품들을 보고, 또 오래 즐기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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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스케치전 제13회 샘골스케치전 개막 행사에도 막걸리를 사 가지고 갔다. 당연히 막걸리는 준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기에...축사를 하면서 엉뚱하게 막걸리 예찬론도 펴고... ⓒ 지요하


나는 미술작품 전시회장을 찾을 때는 술과 안주를 사 가지고 갑니다. 술도 보통 술이 아닌 우리 고장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를 몇 병씩 사 갑니다. 나는 우리 고장에서 생산되는 막걸리 맛을 최고로 칩니다. 안주는 마누라에게 부탁하여 집에서 만들어 가기도 하고, 직장에 가고 마누라가 집에 없을 때는 시장에 가서 순대나 마른안주 따위를 사갑니다.

그리고 전시회장 안에서 그림쟁이들과 술잔을 기울입니다. 전시회장 안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것은 일단 '파격'입니다. 그런 파격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파격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시회장 안에서 그림쟁이들과 술판을 벌이고, 그들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도 질펀하게 나누고, 그리고 취안으로 그림들을 다시 보는 재미는 정말이지 내 '사는 재미'의 확실한 한가지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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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주로 그림 전시회장을 찾아 그림쟁이들과 막걸리를 나누곤 했는데, 올해부터는 서각쟁이들과도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서각협회 태안지부 창립전이 진행되던 지난 11월 16일에는 처음으로 고장의 서각쟁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외지 출타로 창립전 개막식 행사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했던 내가 마지막 날에 막걸리 병을 한 보따리나 들고 불쑥 나타나니, 나를 알아본 초면의 서각쟁이들이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내가 더 고마울 지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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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스케치전 제13회 샘골스케치전 마지막 날 회장 허만복 화백과 함께. 그림은 권오철 화백의 작품이다. ⓒ 지요하


지난 28일은 올해의 우리 고장 마지막 미술전시회인 '샘골스케치전'이 막을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22일의 개막 행사에도 참석하여 이미 한 차례 취안으로 그림들을 보았지만, 우리 지역이 겪는 기름 재난 속에서 어렵게 연 고장의 올해 마지막 미술전시회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28일 오후에도 태안문예회관을 찾았습니다.

그날 오후 태안문예회관 대공연장에서는 '기름재난피해 보상대책 설명회'가 열리고 있어서 바로 옆의 군민체육관 주변까지 차 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하여 정부의 피해보상 대책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피해 주민들을 생각하면 적이 미안한 일이었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의 자리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이 막걸리 병이 여섯 개나 든 보따리와 순대 보따리를 양손에 무겁게 들고 문예회관 전시실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지 싶습니다. 작품을 출품한 그림쟁이들 다수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이들이어서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샘골스케치회 회장인 허만복 화백과 전 회장인 권오철 화백, 전·현 총무들인 신현주, 이세교 화백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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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스케치전 제13회 샘골스케치전 첫날인 22일 오후 박라정 작가의 작품 앞에서 박라정 작가와 함께 ⓒ 지요하


나는 성인병들을 갖고 사는 건강 문제로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앞으로도 고장의 미술작품전시회 때는 전시회장에서 그림쟁이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확실한 취안으로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는 그 행복을 사는 날까지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미술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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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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