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내내 한국 권력이 끝끝내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 바로 '양력설'이다. 고종으로부터 시작해서 총독부 및 이승만-박정희 등의 소위 근대화 세력은 국민에게 양력설을 강권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의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72년 11월부터 양력을 채택한 메이지정부는 기존의 음력 오절구(五節句)를 금지하고 양력 삼대절(三大節)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음력 오절구란 인일(1월 7일), 상사(삼월 삼짇날), 단오, 칠석, 중양을 가리키고, 양력 삼대절이란 1월 1일, 기원절(2월 11일), 천장절(현임 일왕의 생일)을 가리킨다.
메이지정부가 양력설을 강요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서구화 혹은 근대화를 목적으로 국민의 의식을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는 소위 천황숭배를 목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양력 삼대절 중 기원절(최초 일왕인 신무일왕의 즉위일)과 천장절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에 관해 좀더 덧붙이기로 한다.
메이지 이전의 일본인들은 소위 천황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숭배한다는 관념은 없었다. 소위 천황은 저 멀리 교토에 사는 막연한 존재에 불과했고,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무사들이 중심이 된 막부 권력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의 현실 세계에서는 소위 천황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소위 천황 중심의 권력체제를 표방한 메이지 주역들의 입장에서는, 국민들에게 갑작스레 소위 천황을 숭배하라고 강요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을 강요할 만한 명분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국민들의 의식을 확 바꾸어버리자는, 다소 '무식한' 발상이었다. 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민들의 시간관념을 양력 위주로 바꾸고 그 틈에 소위 천황 숭배의 관념을 주입하자는 것이었다. 소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현실세계를 만들려면 기존의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음력 시간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종래의 음력에서는 소위 천황을 숭배하는 명절이 없었기 때문에, 공권력을 바탕으로 새로이 양력 관념을 도입하면서 거기에 소위 천황을 숭배하는 2개의 명절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전두환 집권 초기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길거리에서 장발을 단속하는 등의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에 신군부 권력의 정통성을 만들어냈던 것과 방법 면에서는 다를지라도 기본 목표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천황 숭배체제 확립 위해 '양력설' 강요
일본인 학자 아리이즈미 사다오가 1968년 10월 <역사학연구> 제341호에 기고한 '메이지국가와 축제일'이라는 논문에서도 같은 취지의 분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기초가 취약한 메이지정부가 일련의 곤란한 정치경제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통일적 지배자로서의 천황의 권위를 제고하고 전 국민의 천황으로의 귀일(歸一)을 달성하기 위해 양력 명절을 강요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메이지정부는 국민의 시간관념을 바꾸어놓음으로써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주입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정치 기술자'들이 국민의 신체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정부의 신정책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정책을 시작한 지 30년이 넘도록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도 오늘날의 한국인들처럼 음력 명절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의 히로시마현·시마네현 등의 문서를 보면, 메이지정부가 공무원과 지방 사족(옛 무사계급)을 동원해서 양력 명절을 확산시키려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일본정부가 '개인적 경사도 가급적 위의 삼대절 중 하나를 골라 그날 치르라'고 권장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메이지정부가 이처럼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1월 1일 등 양력 명절을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민들은 새로운 습관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오늘날처럼 일반적으로 양력설을 쇠게 된 것일까? 한국이나 중국은 그 험한 서구화 혹은 근대화의 충격을 받고도 여전히 음력설을 쇠고 있는데, 왜 일본만 유독 양력설을 확고하게 쇠고 있는 것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러일전쟁(1904년)을 계기로 한 '일본 지주층의 국가권력에의 기생'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은 일본의 자본주의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킨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의 성과를 계기로 일본의 지주층은 국가권력에 기생함으로써 부를 한층 더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업자본가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러일전쟁은 '구체제의 사회지배층인 지주계급'이 '신체제의 사회지배층인 자본가계급'으로 성공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는 지주층이 자본가층으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그것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의 지주계급이 양력설 정착에 앞장서
이처럼 새로운 권력의 은덕을 입게 된 일본의 지주계급은 국가정책의 충실한 수행자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지정부의 은혜를 입은 그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을 확신했고, 그에 따라 정부의 중점시책인 양력명절 정착에도 적극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지방에 거점을 둔 지주층의 영향력 행사에 힘입어 양력설 등이 사회 저변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농업경제사회에서 지주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공업경제사회에서 '사장님'의 영향력보다 더 막강한 것이었다. 공업경제 하의 사장은 노동자의 노동력만 지배하지만, 농업경제 하의 지주는 농민의 인신(人身) 혹은 일상생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TV 뉴스에서 대통령이 뭐라고 말하면 그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칠 수 있어도, 회사 사장이나 교회 목사가 뭐라고 말하면 그 앞에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게 일반 서민들의 처지다.
농업경제사회에서 지주를 모시는 농민의 입장도 그와 다를 게 없다. 지주가 권장 혹은 부탁하는 일이라면, 그것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농민의 처지인 것이다. 기존의 시간관념을 바꾸는 게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자신과 가족의 '목구멍'이 걸린 일이라면 '그까짓 것'을 바꾸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지주계급의 적극 협력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여 러일전쟁 이후 양력설이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메이지정부는 지주층에게 경제적 혜택을 베풀어 그들을 아군으로 만듦으로써, 시간개념의 혁명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정책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본다면, 20세기 전후에 일본사회에서는 지주층이 최하위 민중을 비교적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국가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그 지주층을 확실히 포섭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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