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불의 심판 - 69회

조국의 부름 - 4

등록 2008.01.02 10:17수정 2008.01.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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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입가심으로 맥주 몇 병씩을 더 마시고 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바가 못내 아쉬운지 고개를 떨어뜨렸다. 보리에스는 그녀의 힘없는 어깨를 감싸 안고 작별키스를 해 주었다. 선술집을 나서니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에바가 나지막이 ‘눈이 내리네!’ 라는 샹송을 흥얼거렸다. 셋은 에바의 허밍을 들으며 달빛 아래 은은하게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험프리스의 겨울은 유난히 폭설이 잦았다. 덕분에 버뮤다 대원의 겨울도 오로지 눈과의 전투였다. 차운형과 원용철은 훈련다운 훈련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겨우내 제설작업에 동원되었다. 연병장과 산악구보 코스, 사격장, 부대 앞 산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게 주요 일과였다. 훈련이래야 산악구보와 사격, 그리고 내무반에서 필름을 시청하며 게릴라전을 학습하는 게 고작이었다.

 

봄이 되자 험프리스가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 파릇한 새순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버뮤다 대원들도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겨우내 내무반에서 시청한 필름을 실전에 응용하는 데 주안점을 둔 훈련이었다. 침투와 소개(疎開), 시가지 전투, 인질구출 및 요인암살 등이 마치 실전처럼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같은 중대 안에서도 중대원 전체가 모일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내부반도 소대 단위로 되어 있는 데다 훈련 역시 소대 단위로 실시하다보니 더욱 그러했다. 그게 의아해서 원용철이 물었더니 보리에스가 대답했다.  

 

“작전은 대개 소대 단위로 이루어지지. 중대 단위 작전이라 하더라도 각 소대별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소대 단위나 마찬가지야. 중대원 전체가 훈련할 때는 실전에 투입되기 직전뿐이야.”

 

봄, 여름이 가고,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의 문턱에 와 있었다. 그 동안 차운형과 원용철은 버뮤다 외인부대원으로서 받아야 할 훈련이란 훈련은 거의 모두 섭렵하다시피 했다. 일과가 시작될 때 소대장이 작전명을 내리면 둘의 머릿속에선 곧장 그날의 시간표가 코스별로 그려질 정도였다. 그러자 둘은 타성에 젖어들었고 하루하루가 권태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날 이렇게 훈련만 받다가 세월 보내는 겁니까?”

 

차운형이 보리에스에게 물었다.

 

“작전에 나가는 것보단 훈련받는 게 더 낫지 않나?”

 

보리에스가 자못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겨워서 그러죠. 그런데 다른 대원들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네요?”

 

“지겨울 게 뭐가 있어? 이게 직업이고 직장인데.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제대하면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고.”

 

그러나 차운형으로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버뮤다를 직장으로 여겨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제대 후의 삶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더군다나 없었다. 보리에스가 그의 생뚱한 얼굴을 보고 한마디 덧붙였다.

 

“누구나 처음엔 훈련만 받는 걸 지겨워하지. 다들 사회에선 괄괄하던 성격이었으니까. 당연히 훈련만 받는 게 스트레스가 돼. 하지만 두세 번씩 작전에 참가하다 보면 생각이 달라져. 우리가 출동하면 반드시 적을 사살해야 하는데, 그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고 나중엔 부담스러워지는 거야. 아무리 적이라지만 남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가급적이면 작전에 포함되지 않길 바라게 되지. 사실 엄격히 따져보면 우린 감옥생활 대신 하는 거거든. 물론 감옥생활보다는 확실한 반대급부가 있으니까 그나마 견디고 있지만…….”

 

불현듯 보리에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훈련을 소홀히 하거나 하진 않아. 훈련에서 흘린 땀이 실전에서의 피를 대신 하거든. 작전에선 소대원들의 팀워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훈련을 소홀히 한다는 건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원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처사라구. 그러니까 자네들도 훈련을 지겹게만 생각하지 말고 충실히 하도록 해.”

 

보리에스의 말을 듣고 보니 둘에게도 제대 후의 삶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중한 추억을 꺼내든 기분이었다. 그러자 훈련이 지겹지도, 짜증스럽지도 않고 나날이 즐거웠다. 제대할 때까지의 하루하루가 미래를 위한 저축이요 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차운형과 원용철이 전투중대에 배속 받은 지도 일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보리에스가 다시 본부중대로 복귀할 시점이 된 것이었다. 그는 둘의 사수 노릇을 완벽하게 수행한 데다 더욱이 본부중대는 작전에서 열외이기 때문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서 일찌감치 더블백을 싸놓고서 손가락으로 날짜만 꼽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작전이 떨어졌다. 보리에스의 복귀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즉시 중대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래도 보리에스는 실망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작전보다는 훈련이 낫다던 평소의 지론으로 봐선 낙담이 클 텐데도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원용철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개는 딱 두 종류밖에 없어. 달려드는 놈과 꼬리치는 놈. 달려드는 놈이 죽지 않을 만큼 몽둥이질을 당하는 반면, 꼬리치는 놈은 귀염 받고 배불리 먹지.”

 

“상사님이 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개잖아요.”

 

개에 비유하는 보리에스의 말이 거슬렸는지 원용철이 목청을 돋우었다.

 

“왜? 개라 그러니까 기분 나쁜가?”

 

“그럼 개라 그러는데 기분 좋아할 인간 있습니까?”

 

“우긴다 해도 우린 개야. 우리의 주인은 미합중국이고. 개에겐 딱 두 가지만 필요하지. 고기와 몽둥이. 요즘 들어서 자꾸만 체 게바라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나도 죽었어야 하는 건데 싶기도 하고.”

 

“…….”

 

“체는 최소한 개는 아니었어. 나는 지금 고기와 몽둥이만을 의식하며 살고 있지만 체는 신념으로 세상을 산 진정한 사나이였어.”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욘 없잖아요?”

 

보리에스의 침울한 얼굴을 본 원용철의 목청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진실이 그런 걸 어떡하나? 미합중국이 우리가 예뻐서 받아줬겠나? 천만에.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켜줄 개가 필요했던 거야. 주인에겐 온순하지만 적에겐 한없이 사나운 개가 말이야. 그들은 굶주린 개의 광기를 샀을 뿐이야. 굶주린 개에게 고기를 던져주면 그 개는 절대로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이거든.”

 

“…….”

 

2008.01.02 10:17 ⓒ 2008 OhmyNews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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