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
MBC
드라마 <이산>을 보고 있노라면, 1977년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생각난다.
엄마는 동생 철호를 낳다가 사망하고 아빠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탓에 사실상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13세 소년 김영출. 부모 대신 동생까지 보살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야구선수로서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는 김영출의 장한 모습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정조 이산의 경우에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아니라 <아빠 없는 하늘 아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속 이산은 ‘아빠’의 적들이 가하는 끊임없는 암살 음모를 간신히 피해 가면서 왕자(王者)의 꿈을 펼쳐 나가는 ‘외롭고 절박한 세손’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수행 내관(남 내관 ×)마저 이산의 적들에게 은밀히 정보를 넘겨줄 정도로, 궁궐 안이 온통 다 이산의 적들인 것만 같다.
<이산>의 최근 방영분에서 영조가 “중전이 궁에 들어온 지 14년 정도가 흘렀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 현재 이 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은 정조 즉위(1776년) 직전인 1770년대 초반인 듯하다. 지금까지의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느낀 점 중 한 가지는 ‘이산의 주변에 사람이 너무 없다’라는 점일 것이다.
어머니 홍씨와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심정적으로만 세손을 비호할 뿐 뾰족한 도움은 주지 못하고 있다. 채제공, 홍국영, 남 내관이 세손을 충실히 보좌하는 정도다. 그리고 성송연과 박대수는 위기 때마다 세손을 보호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으로 때우는 일뿐이다.
한편, 할아버지인 영조는 은밀히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산을 지켜주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균형과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영조는 세손에 대한 태도에서도 일종의 탕평을 표방하고 있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드라마 <이산>에서 묘사되는 상황에 따르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지지자 밖에 없는 세손 이산은 언제나 적의 암살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 “나뿐만 아니라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세손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병조판서 아무개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영조시대에는 고위 관료들의 대부분이 세손을 싫어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쉽다.
하지만, 드라마 <이산>은 주인공 정조의 생애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조 이산의 환경을 비극적으로 만들어놓은 측면이 있다. 만약 상황이 정말로 그러했다면, 세손 이산은 국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벌써 누군가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설령 암살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세손의 지위조차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영조가 보호해준다 해도, 고작 몇 사람 밖에 안 되는 인적 기반으로는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원은커녕 시의원에도 출마하기 힘들 것이다. 과거의 왕조 창립자나 현재의 대권 후보자들의 사례를 보면, 적어도 20~50명 정도의 친위세력은 보유하고 있어야 일국의 최고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것 같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불리한 조건 하에서도 이산이 대권에 올랐다는 것은, 위의 몇 사람 외에도 그를 지켜주는 또 다른 정치적 요소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적 상황에 놓인 한 인물을 보호하는 요소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권력 혹은 세력을 보유한 인물이나 집단이 한 인물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경우다. 둘째로는 복합적인 정치적 역학구도가 한 인물을 보호하는 경우다. 셋째로는 정치적 결집을 이루지 못한 수많은 대중의 심정적 지지가 한 인물을 보호하는 경우다.
세손 이산의 경우에는 위의 첫째 및 둘째 요소가 어느 정도씩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영조의 보호나 홍국영의 가세는 위의 첫째 요인이라고 볼 수 있고, 합종연횡으로 표현되는 당시의 복잡한 붕당구도는 둘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드라마 <이산>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또 다른 세손 보호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조 5년(1729) 기유대처분(영조의 즉위를 방해한 노론 일부에 대한 일종의 무죄 처리) 이후 영조는 붕당 타파를 목표로 한 탕평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붕당정치가 타파된 것은 아니다. 탕평을 지지할 것인가를 놓고 새로운 합종연횡이 출현하고 새로운 정파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노론 및 소론의 외척들이 중심이 된 탕평당 즉 북당이 영조 후반기의 권력을 주도하고 이에 맞서 남당·동당·중당이 힘을 겨루는 상황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합종연횡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여러 정치세력들이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때였다. 탕평책으로 인해 정치질서가 변동함에 따라 나타난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북당·남당·동당·중당 중에서 세손 이산의 보호를 표방한 세력은 북당과 남당이었다. 양쪽 다 외척이 중심이 된 붕당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외척세력이 합세한 집권 북당은 홍봉한·정후겸 등이 중심이 된 그룹이고, 노론으로 구성된 남당은 정순왕후의 동생인 김귀주가 주도하는 그룹이었다.
그런데 북당과 남당은 상호 경쟁적이면서도 세손 이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서만큼은 의견을 같이 했다. 물론 이들이 순수한 동기에서 세손 이산의 보호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산을 대신할 만한 마땅한 후계자를 확보했거나 혹은 세손 교체 이후의 혼란을 감당할 만한 역량이 있었다면, 그들의 태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세손 이산도 북당·남당이 자신에 대한 보호를 정치적으로 표방할 때마다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산은 그들의 주장을 정략적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든지 간에 여·야 정치세력이 세손의 보호를 정치적으로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세손을 암살하기가 힘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세손을 암살한다면, 북당·남당 측에서는 속으로는 어떠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암살자와 그 배후의 처단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세손이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런 처단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손을 암살하려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이산 역의 이서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자객도 함께 등장했다. 이것은 이산이 그만큼 어려운 조건을 뚫고 국왕에 등극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 실제 역사가 그러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산이 세손이었을 때부터 이산 편에 선 김종수는 이미 영조 시대부터 노론 청명당의 리더였다. 그는 강경보수파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이 점은 이산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없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국왕 영조 외에도, 세손 보호를 표방한 여·야 정치세력의 존재 및 경쟁이 이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정파들이 세손 보호를 정치적 구호로 표방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손이 일정 정도의 입지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세손 보호를 표방했다고 하여 반드시 세손의 우군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합종연횡이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당시 정치질서의 유동성 및 가변성 등의 요인이 작용하여 여·야 정당들이 세손 보호를 경쟁적으로 표방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어느 한 정파가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조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세력도 세손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가 힘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 암살음모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나 이산 주변의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했다고 묘사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조의 수난을 강조하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즉위 이전에 세손 암살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보아, 세손에 대한 음해는 홍국영이 이산 측에 가세한 1772년부터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세손과 홍국영을 떼어놓기 위한 정치공작이 시작되면서부터 익명 투서 사건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염탐설·자객설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산이 1776년에 등극했으니까,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제의 세손 이산은 드라마 <이산>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렇게 외롭거나 절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산이 연산군과 유사한 경험을 겪었으니까 정치세력들이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종의 시스템 정치인 붕당정치가 확립된 조선 후기사회에서 국왕이 자기 아버지의 한을 풀겠다고 마음대로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연산군의 사례는 이산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요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억제하는 요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한을 풀려고 복수극을 벌인 연산군은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의 이산과 달리 실제의 이산은 그렇게 외롭거나 절박하지는 않았지만, 실제의 이산은 드라마 속의 이산보다도 더 많은 심리적 긴장감을 느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즉위 이후에는 수구보수파들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심리적 긴장감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드라마 <이산>의 아슬아슬한 극적 장치는 고독하고 절박한 이산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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