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3성 중의 하나. 요녕성의 북쪽, 동북지방의 중앙부에 위치한 길림성. 성의 절반 가량이 백두산의 산계와 접하고 있고, 중앙에는 쑹화호가 펼쳐져 있다. 우리는 재중동포 배선생님의 댁에서 하루를 묵었다. 배선생님 댁은 길림성의 한 시골, 왕청현이다. 이른 아침 백두산으로 가는 차편을 구하기 위해 배선생님은 이웃 마을로 길을 떠났다.
배선생님은 한국에서 법무부 직원에 의해 체포되어 외국인보호소에 며칠 동안 갇혀 있다 중국으로 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더욱 그랬던 것인지 모른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우리와 몇 해 만에 상봉한 배선생님은 한국에 대한 쓴 소리를 여과 없이 쏟아놓았다.
‘한국은 좁아서 볼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다는 것. 사람들은 동포들을 무시하며 2등 국민 대하듯 한다는 것.’ 흔히 중국동포에게서 나오는 전형적인 한국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조금 더 과할라 치면 ‘중국 13억 인구가 동쪽으로 일제히 소변을 보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지’라고 쓴 웃음을 지으며 한국을 비꼬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재중동포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뭐라고 딱히 요연하게 정리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부러움과 또한 그 한국사회에서 당당히 동포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한 배신감이 긴장을 이루며 혼돈스럽게 섞여있는 것 같다.
방문 여행을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재중동포들과 어울리며 수도 없이 들어야 했던 한국에 대한 원망 섞인 말들을 이 곳 중국에 와서까지 접해야 하는 상황이 무척 씁쓸하게 느껴졌다. 어려움에 처한 재중동포들을 도왔던 우리 일행 역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라도 했는지, 배선생님은 위험스러우리만치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며 우리 앞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태연하게 배선생님의 항변을 들어주는 척 하며, 90년대 중반부터 의형제를 맺어온 두 재중동포 남매를, 그리고 나와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는 새터민 조카들을 떠올렸다.
‥‥‥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우리 교포들을 아주 잘 챙겨줬지 뭐. 어떤 때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난 후 밥값을 내려다 중국동포라 하면 돈을 안 받는 데도 있었지 뭐.”
유난히 얼굴색이 잿빛으로 그을린 듯 검어서, 아랍인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 선택형님은 중국 하얼빈에서 오신 재중동포이다. 중국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한국의 한 국립대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와서 학위를 마쳤으나, 전공을 살린 취업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성남 중국동포의 집을 알게 되어 틈틈이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이었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한 자기제조업체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도자기 위에 간단한 동양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벌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선택형님에게는 누님이 한분 계신데 역시 중국동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해주시며, 주중에는 강남에 있는 한 음식점에 나가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설거지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성남시청 앞에 자리한 붉은 벽돌의 고풍스런 교회인 주민교회 지하에 자리한 중국동포의 집은 이렇게 자원봉사를 하는 재중동포는 몇 안 되고 사실은 도움을 받으러 온 재중동포, 중국인,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로 넘쳐났다.
선택형님과 순현누님은 중국동포의 집 근처의 한 빌라에서 두 칸짜리 옥탑방을 겨우 구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96년 자원봉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많은 재중동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결국 이 남매분들과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옥탑방 두 칸짜리 방에서 이들과 1년간을 동고동락하던 지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재중동포들의 한국에 대한 원한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그 대상도 악덕 기업주 등 일부 부류를 향한 것으로 국한되었었다.
“지금이 겨우 90년대 중반인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왜 그렇게 중국동포들에 대한 대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 거예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어서 구로역 고가도로에서 중국산 한약재를 팔다가 몇 번이고 단속을 당해서 쫓겨나야했던 이전의 일을 이야기하며 선택형님이 말을 이었다.
“아마. 동포들이 너무 많아지기 시작해서 일거야. 여기 모란시장 알지? 모란시장에 가봐. 새까맣게 중국동포들이 모여서 시장을 본다니까. 가리봉에는 더하지. 중국에서 직수입한 식재료들만 파는 슈퍼마켓도 벌써 몇 개나 생겼다고. 몇 년 사이에 중국동포들이 너무 많아진 거야.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중국동포들이 이젠 지겨워지기 시작한 거고, 이제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같아.”
처음 자원봉사를 시작하고 나서 중국동포의 집 쉼터에서 몇 달간 합숙을 했다. 지하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곰팡이 냄새와, 쉼터의 사각 벽면들을 빙 에둘러 치열하게 자리를 차지한 동포들의 기름때 묻은 짐짝과 작업복에서 흘러나오는 매캐한 합숙소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공간이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지하 중국동포의 집. 규칙을 피해 몰래 숨겨서 가져온 중국 고량주를 훌쩍 훌쩍 마시며 음습하게 한국을 비난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그나마 선택형님의 옥탑방에서는 한국을 바라보는 조금은 더 진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곤 세월이 한참을 흘러 2000년에 접어들면서 새터민 청소년들과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들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낮에는 이주노동자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밤이면 퇴근을 하여 새터민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였었다. 나는 종종 친한 이주노동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저녁 대접을 해주곤 했는데, 유독 내가 지부를 맡고 있던 안산시에는 중국인과 중국동포들이 많아 집에 오는 손님들도 중국인과 중국동포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처음에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중국노동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할 때에는 새터민 조카들이 함께 식사도 하며 장난도 치고 무척 좋아했는데, 재중동포가 집으로 와서 저녁을 함께 먹을 때마다 아이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얼른 밥만 먹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고, 아예 면전에서 인상을 쓴 채로 밥을 먹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재중동포들이 집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녁에 없는 약속을 만들어 밖으로 외출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아이들을 불러서 버릇없다고 야단을 치던 도중 한 번은 조카들 중 제일 큰 맏이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어보기로 했다. 돌아온 대답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이유였다.
“삼춘은 잘 모름다. 우리가 저 사람들 때문에 중국에 있을 때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진짜 모를껌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중국에서 떠돌 때 그나마 말이 통해서 밥이라도 한 끼 주고, 여기 저기 너희들 도와주는 단체 소개도 해주고 한 사람들이 다 저 중국동포 아니야!”
나는 간혹 우리 아이들이 두만강을 넘어 처음 발견한 집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했을 때 하얀 잎쌀밥을 꾹꾹 눌러서 퍼준 사람들이 조선족, 즉 재중동포라는 이야기를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이외의 이야기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 싶지 않아 한국에 오기 전의 일들에 대해서 아이들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는 묻지 않으려고 했었다.
“아 삼촌. 그거야 아주 옛날,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막 건너왔을 때 얘기지. 그 때야 우리같은 꽃제비들이 몇 명 있기나 했간? 그렇게 우리한테 잘 해준 것도 채 일 년도 안됐지. 그 이후론 저 사람들 우리 적들로 싹 변했어. 삼촌 말했잖아. 내가 세 번 잡혀갔었는데 그 중 두 번이 저 조선족들이 중국 공안에 신고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한 번은 한 패거리들이 나에게 와서는 너 북한에서 온 놈이지? 이러면서 바지를 내리라고 해놓고는 내 꼬추털을 불로 지져버린 적도 있어. 이제 알겠어? 내 말? 우리가 왜 저 사람들 이렇게 싫어하는지?”
맏이 조카가 제풀에 흥분했는지 언성을 높이며 중국에서 겪었던 억울한 사연들을 이야기하지 조금 더 아래 조카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하나 둘 씩 자신들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재중동포들에게서 겪은 어려운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주로 그들로 인해 중국 공안에 잡혀갔던 일, 패거리들에게 걸려들어 집단 폭행을 당한 일 등이었는데 믿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일들도 많이 있었다.
북녘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두만강을 넘는다. 사력을 다해 건넌 중국 땅에서 마주한 동포들에게서 심한 차별과 학대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재중동포들은 갈수록 암담해지는 중국의 빈부격차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부여잡고 한국으로 노동을 팔기 위해 건너온다.
그리고 마주하는 차별과 온갖 냉대. 그 속에서 이들은 한국인보다 차라리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동포의 땅 한국을 가슴 속에서조차 거부한 채 등을 지고 떠난다. 이 어처구니없는 암울한 비극이 숨 막힐 듯 내게로 다가온다.
그래 그런 차별을 넘어서보기 위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데, 손짓하고 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느새 그 상처가 자신의 온 세계를 뒤덮어 모든 것이 상처를 주는 것들로만 가득 차게 보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한 때 이들을 따뜻하게 환대했던 그 고마운 마음들을 압도해버린 것일까? 무엇이….
“차 선생님 차 준비 다 됬어요!”
어느새 배선생님이 이웃 마을을 다 돌아 우리를 위한 차를 마련해왔다. 잘 빠진 최신형 현대 소나타이다.
“아니 한국 차네요. 꽤 비쌀 텐데.”
“괜찮습니다. 보통 손님이 아닌데 이 정도는 해야죠. 자 여기 운전수는 제 후배입니다. 이 친구가 오늘 하루 종일 백두산까지 차선생님 일행을 안내할 겁니다. 마음 편히 다녀오십시오.”
자동차로 쉼 없이 다섯 시간은 달려야 백두산이 나온다 하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간단히 감사의 인사를 마치고 한국 차량에 탑승하여 백두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이 온통 진초록 푸른빛이다. 동북3성에 다다르기까지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중국 산둥성, 화북성 일대와 달리 가는 곳마다 산과 계곡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나무의 수종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산세 역시 우리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해서 역시 한반도의 산맥이 이곳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자연 풍광 자체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세 시간 가량 가던 도중 갑자기 제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비가 있어요. 중국에 와서 제비를 본 건 처음이에요.”
한국 나의 고향에 흔하디흔한 새, 제비. 그 제비를 본 반가움이 이렇게 클 줄이야.
“아. 여기는 조선족 민속촌입니다. 이 곳 집들이 대단히 깨끗하고 사람들 생활환경이 깨끗해서 아마 이곳에 제비가 살 겁니다.”
역시 재중동포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는 차를 세워서 잠시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예쁘고 작은 텃밭에는 호박 넝쿨이 아기자기 집울타리를 넘보고 있었고, 문설주를 바른 빨간 채색이 아름다운 아담한 집 위 산뜻한 제비의 날갯짓이 청명한 하늘을 벗 삼아 한껏 가볍다. 이웃집 툇마루 위에는 옥수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우리는 한 참을 그렇게 마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지막한 지붕 위에 평화가 내려앉는다.
‘우린 이렇게 아름답게 잘 살고 있잖아. 우린 정말 착한 민족이잖아.’
언젠간 서로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그런 화해의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우리는 백두산으로 출발했다.
2008.01.07 10:21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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