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이 이번에 새로 나왔습니다.
양철북
- 책이름 : 우리와 안녕하려면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그림 : 츠보야 레이코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양철북(2007.12.14.)
- 책값 : 9800원
(1)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
지난주 토요일, 도서관에 놀러 온 동네 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한창 하다가 저희끼리 속닥속닥 하더니 책상 서랍을 몰래 뒤지며 키득키득 합니다.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이것 주웠어요.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하고 말하며 ‘타 먹는 커피봉지’를 흔듭니다. 그러고는 그 커피를 타서 마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을까요. “그게 왜 땅에 떨어져 있는데?” 하고 묻지만, 아이들은 능구렁이처럼 모르쇠로 밀어붙입니다.
…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가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 ‘돼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 (14쪽)이튿날, 동네 아이들이 컵라면을 들고 옵니다. 도서관에 놀러 오면서 책 읽을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아이들. 컵라면에 물을 받더니 책으로 뚜껑을 받칩니다. “책은 종이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책이 다치잖아요” 하고 말해도 못 들은 척. 그러면서 나보고 “나무젓가락 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무젓가락을 왜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하고 말하지만, “더럽잖아요!” 하고 말하기만 합니다.
얼마 뒤, 바깥나들이를 다녀온 옆지기가 아이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따끔하게 나무랍니다. “여러분은 친구네 집에 가서도 이렇게 해요? 친구네 집에 가서도 냉장고를 뒤져서 마음대로 먹을 것을 다 꺼내먹고 서랍을 뒤져서 자기 것으로 가지고 해요? 도서관이 뭐 하는 곳이에요? 책도 안 읽으면서 그렇게 놀러만 오는 곳이에요? 지난번에 어질러 놓은 것도 하나도 안 치우고 가고. 그렇게 하려면 앞으로 도서관에 오지 마세요!”
…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하면 할 수 있어. 일본인을 이기는 조선인이 나타났지. 더러는 좋은 일본인도 있었지만, 못된 일본인이 더 많았어. 일본인을 이겼다고 몹시 구박을 하더군. 나는 고집이 셌기 때문에 아무리 구박해도 꿋꿋이 연습해서 시합에 나갔지. 그리고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지.” 다들 남자의 억센 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독일 선수가 왔을 때 최초로 국제 시합에 나갔지. 기뻤지. 열심히 해서 결승전에서 3등으로 들어왔어. 일본, 독일, 조선의 순서였지. 일본 국기가 올라갔고, 그리고 … 그러고 나서 올라간 것은 역시 일본 국기였어. 나는 울었어. 관중들은 기뻐서 우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뒤 난 수영을 그만뒀어.” 내 목이 꿀꺽 울렸다. “내가 다시 수영을 하게 된 것은 소순이가 수영을 하면서부터야. 오랫동안 나는 저항해 왔지. 오랜 저항이었어.” … (36∼37쪽)
아이들은 도서관 전화로 장난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장난전화하려면 전화 쓰지 마세요”라 말해도 “뭐 어때요?” 하면서 스스럼이 없는 아이. 왁왁 소리를 지르고 손찌검을 하거나 회초리를 들어야만 말을 들을까요. 부드러이 타이르는 말은 귀에 꽂히기는커녕 한 귀로 빠져나가거나 아예 귀로 들어가지도 못할까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들은 다른 동무한테 전화하면서, “○○야, 너, 왕따 시키고 싶은 애 있으면, ○○로 데리고 나와”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그저 장난으로 또는 재미로 다른 동무를 따돌리면서 재미있어 하는지.
… 얼마 후, 선생님이 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국기게양 때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것도 벌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도요. 우리가 교장실에 몰려가려 하자 선생님께선 말리셨죠. 그리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씀하셨어요. “만일 나를 위해 뭔가 해 줄 생각이 있으면 오키나와에 대해 공부해 다오. 그걸로 충분하다.” … (56∼58쪽)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나서 심심하면, 그예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어른들 흉내’를 냅니다. 어디서 얻었는지 화장품으로 얼굴을 허옇게 바르고 눈썹을 세웁니다. 저 나이에 벌써 화장놀이, 아니 어른 흉내라니. 그것도 좋은(?) 어른 흉내가 아니라 껍데기만 들씌우는 어른 흉내를. “예쁘면 좋잖아요!” 하는 아이들 눈에는 어떤 모습이 예쁜 얼굴일까요.
곰곰이 떠올리면, 우리들 어릴 적에도 텔레비전 가수나 연예인들을 따라하면서 놀았으니, 이 아이들이 ‘텔미’ 춤을 추면서 노는 일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텔레비전 연예인 따라하기가 참말 문화가 맞을까요.
… 하지만 선생님,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 사친은 그것도 인간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결코 우리를 억누르지 않으세요. 그건 선생님께서 이제까지 사람들한테 억눌려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주제넘게 … (66쪽)어질러 놓기만 하고 조금도 치우지 않는 동네 아이들. 골목길 마실을 하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핏설핏 흘려듣는 아이들 말이며 몸짓이며 볼 때면, 하나같이 안쓰럽고 걱정스럽고 슬픕니다. 이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요. 이 아이들 부모는 집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던져 주고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설까요. 도서관에 오는 동네 아이들한테 책을 주면서 “너희 담임 선생님한테 드리렴” 했더니, “우리 선생님은 책 안 봐요”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집에서 부모님들은 책을 얼마나 볼까요. 아니, 책을 본다는 생각을 해 볼까요.
(2) 이웃집 아이옆지기가 동네 아이들을 따끔하게 나무라며 내쫓은 뒤, 성당 반 모임이 있어서 이웃집으로 찾아갑니다. 반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거의 모두 아주머니와 할머니. 오늘은 할아버지 한 분이 있습니다. 1943년에 창영동에서 태어난 뒤 이 동네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할아버지입니다.
“그 집에 불난 적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할아버지네 집은, 배다리 골목집들 한복판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예정터 바로 옆에 있습니다. 당신은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 다니기도 모두 이 동네에서 했지만, 부모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한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 딸 아들이 늘 ‘이제 그 낡은 집은 보상 받고 팔아서 우리들(딸 아들) 사는 아파트로 오시라’고 말을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