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으로 살고 싶은 농촌 주민들의 겨울잔치

고흥군 화장장 철회 축하 및 주민대동한마당 행사

등록 2008.01.17 15:38수정 2008.01.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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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고 추웠다. 바닥은 늘 할머니들 몫이다. 차가워 빨리 끝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간의 사정이 만만치가 않아서 행사는 자꾸 길어졌다. 1월 16일 오후 2시 전남 고흥군 남양면 평촌마을에서 열린 '화장장철회 축하 및 남양면민 대동한마당잔치'는 200여 주민 모두 추위에 떨며 시작했다.

 

개회선언에 이어 국민의례, 나란히 자리한 주민들이 일어섰다. "우리에게 청정한 고흥땅 남양땅을 물려주신 모든 조상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리자"고 말하자 바람소리만 남고 고요가 흘렀다. 그리고 다시 찬 바닥에 앉았다.

 

행사 시작 전 참가하기로 한 무게 있는 인사들은 못 오는 것으로 확인됐다. 잠시 동요가 일었으나 계획대로 주민들은 행사를 진행했다. 어차피 이 잔치는 떠다니는 정치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지난 1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주민들의 잔치였다.

 

이런 추위도 별것 아니다. 면사무소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맞으며 농성했다. 군청계단에서 홑이불 하나로 1박 2일을 보냈다. 부당함에 맞서는 저항의 방식을 몸에 익혀버린 주민들이라 기꺼이 한 몸 더할 줄을 알았다.

 

김용택 부위원장의 내빈소개, 맹기선 위원장의 대회사, 그리고 내빈들의 축사가 순서대로 진행됐다. 부탁하지 않아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신문식 부위원장의 경과보고, 회관 콘크리트 마당의 냉기가 뼛속까지 찾아왔다.

 

그러니까 작년 1월 중순 어느 날 저녁에 "고흥군 화장장, 남양 면민 자발적 유치로 5만여 평 건립계획"이란 뉴스를 주민들은 느닷없이 텔레비전에서 봤다. "뭔 소리다냐, 누가 유치했다고?" 주민들은 몇 명이서, 그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자 모였다. 처음 정보공개 요구부터 관은 거짓말을 했다. 또 공개를 요구하고 또 둘러대고 자꾸 하다보니까 진상이 하나씩 밝혀졌다.

 

작년 12월 중순 면장과 군의원은 이장기관단체장 회의를 소집해, 화장장은 지역발전의 호기이니 다른 면이 가져가기 전에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며 토론도 없이 바로 서명을 받았다. 이 서명용지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주민인 것처럼 서명했고 한 직원은 다른 이름으로 이중서명까지 했다. 한편 군의원 땅이 있는 해당 마을에서는 회의도 없이 개개인을 접촉해 "땅을 비싸게 팔 수 있다"며 서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주민 이름을 도용했다.

 

군의원 땅이 포함된 곳에 화장장을 건설하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들이 주민인 것처럼 서명하고, 명의도용 이중서명한 것이 '면민의 자발적 유치'로 둔갑한 것이다. 그런데도 군청은 정상적인 행정이라며 추진을 강행했다. 작년 여름 군의원은 "화장장 안 짓고 김치공장 유치한다"고 했으나, 확인해보니 거짓이었다. 주민들은 "부당하니 철회하라"고 1년 내내 투쟁했다.

 

작년 12월에서야 군청은 "기존 화장장 추진을 철회하고 새롭게 대상지를 물색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이 화장장 철회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자리였다.

 

부위원장은 먼저 "기껏 권력자의 못된 생각 철회시키느라 이 고생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회의 주인임을 각성한 것"은 큰 성과이며, 앞으로는 종처럼 살지 말고 주인으로서 살자고 다짐했다. 이어지는 그간의 투쟁일정 발표는 지루했다. 공식적으로 모인 날짜만도 60여일, 준비하고 고민한 시간은 더 많았다. 요점만 적어도 40여줄, 길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집행부 소개가 이어졌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각 마을을 대표해서 주민들을 독려하고 깃발을 만들고 차량을 동원하고 땔감을 만든 일꾼들이다. 유중만 황일섭 부위원장을 비롯해 김용은 김현권 송두석 도봉배 등 여러 마을 주민들이 소개될 때마다 박수가 이어졌다. 사실 참가한 200여 주민 모두 고생을 한 주역들이다. 이날 잔치도 주민들이 너나없이 기금을 내고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고 행사장을 마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성생협 황동섭씨가 축가로 '광야에서'를 우렁찬 목소리로 선사했다. 이날 내빈으로 약속한 정치인들은 오지 않았으나 멀리서 돈사 공해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포두면 주민과 골프장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영남면 주민들이 참가했다.

 

막바지에 연단에선 지옥태(영남면 금사마을 주민)씨는 "꼭 남양 화장장처럼 고흥군이 영남면에 골프장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개탄했다. "임란유적지와 깨끗한 갯벌이 있는 곳인데, 경험이 없는 주민들로서는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난감한 상태"라며 울상을 지었다. 한 마을에서는 기나긴 싸움이 끝나 잔치를 벌이는데 또 다른 마을에서는 고통스런 싸움을 시작해야하는 농촌 지자체의 사람살이가 만만치 않다.

 

행사가 끝나자 추위에 떨던 주민들은 우르르 회관으로 들어가 음식과 술판을 벌였다. 따뜻하다면 마당에서 잔치를 벌였을 텐데, 초청된 각설이 연극패는 방을 향해 온갖 우스개스리로 주민들을 꼬셨다. 할머니 일부가 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자 각설이는 "곱게 늙으신 분들"이라고 칭찬을 했다. 각설이패도 떠나고 겨울 오후 햇살이 산꼭대기에 걸릴 때까지 주민들은 노래와 춤으로 마음을 달랬다.

 

아래는 경과보고 자료입니다.

 

고흥군화장반대주민대책위 경과보고

<2008.1.16. 화장장철회축하 및 남양면민대동한마당행사 보고자료>

작년 1년동안 피눈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한번도 관을 상대로 집단적인 반대행동을 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들은 참으로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화장장-남양면민의 자발적 유치"는 군의원 면장 이장 들이 비밀리에 명의도용 이중서명한 일종의 사기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고흥군은 정상적인 업무다고 우기며 선진화장장 견학, 대상필지 감정 등 반민주적인 행정을 강행했습니다.


면사무소집회, 군청집회, 철야농성, 도청집회 뿐만 아닙니다. 관련문서 정보공개 요구부터 수 십차례 관청을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호소문을 전달하고 철회서명을 받으러 밤낮으로 뛰어야 했습니다. 협박도 폭행도 당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습니다.

검찰에 의해 서명 범죄사실이 확정되고 군민 여론이 악화되자, 부담을 느낀 군청은 12월 말 "화담마을 군립화장장 건설계획을 철회"했습니다.

우리가 지출한 돈만도 2천만원이 넘습니다. 개인이 기부한 현물, 농사일 못해 손해본 비용을 합치면 엄청난 피해입니다. 이 정성을 다른 일에 써더라면 지금쯤 큰 성과를 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손해를 보고 우리 주민들이 얻어낸 것이 기껏 철회입니다.

못된 권력자들이 사욕을 채우려고 행정을 좌지우지한 결과가 이렇게 주민을 괴롭힌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커다란 분노가 가슴속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희생을 댓가로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첫째 주민자치의 소중함을 깨닭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시키는대로 종처럼 구경꾼처럼 살았습니다.

이 조작된 '화장장 자발적 유치'도 우리가 주인의 권리를 방치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흥군 총 예산이 얼마인지, 그 돈을 어디다 쓰는지 관심없었습니다.

군 예산은 군민을 위한 공금인데, 군민이 주인으로서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 공금이 사사로이 취급되고, 군의원 땅에 화장장 건설계획도 생기고 이중서명도 하고 거짓된 자발적 유치도 만들고 사기 김치공장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화장장 뿐입니까? 부실하고 엉뚱한 공사와 잘못된 태풍피해 보상 같은 작은 일부터, 화장장 골프장 페기물처리공장 등 지역민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업들이 공익이란 이름으로 쉽게 강행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주민이 주인이고 주민이 권력입니다. 군수나 군의원, 군청이나 면사무소 공무원들도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받고 업무를 수행하는 일꾼입니다. 한번 뽑혔다고 주민위에 군림하고 주민을 속이려 한다면, 공금이나 축내는 불필요한 집단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주민자치의 책임을 다 해 나갈 것입니다. 면정과 군정, 예산 집행 등을 책임있게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주민에게 어떤 사업이 필요한지 연구해서 적극적으로 제안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조만간 새로운 주민모임, <남양면 주민협의회(가칭)>을 결성할 계획입니다. 화장장 투쟁에서 고통의 댓가로 얻은 소중한 경험을 살려 주민이 진정으로 주인되는 활동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둘째 청정지역 보전의 절실함을 느꼈습니다.

남양면은 양쪽이 바다이고 들판이 온화한 구릉지이며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전략적 요충지, 남양산성도 거의 방치되어 있습니다. 바닷가 갯벌도 정책적으로 보전한 적이 없습니다. 구릉지 전답에 친환경적인 작물재배도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태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보전하고 자원화 하는 것이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방치한 채 주민을 속이는 일에 매진했으니, 지역이 가난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화장장 지어 경제를 살리겠다는 가짜 지역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생태문화유산 자원화 해 진짜 지역경제살리기를 추진해 가야겠습니다.


작년에 고흥군이 친환경지역으로 선포한 금산면은 수십년간 파헤쳐진 석산이 있습니다. 고흥군은 그곳에다 거대한 태양광발전소를 유치했고 또 조선소공장을 유치했다고 홍보했습니다.

친환경지역에 공장을 자꾸 유치하는 발상도 문제지만, 왜 금산면만 친환경지역인가?입니다. 공장이 없는 우리 청정한 고흥군, 나머지 면지역도 당연히 친환경지역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남양면을 친환경지역으로 지정할 것을 요구할 계획입니다.


끝으로 화장장과 관련해 저희들의 입장을 다시 밝힙니다. 우리가 지난 12월 전남도청을 방문했을 때 담당자들은 "전남도에 이미 운영 중인 화장장 시설이 모두 적자"라고 했습니다.우리는 "전남(재정자립도 전국최하, 급격한 인구감소)지역 시군마다 화장장을 하나씩 건설한다는 것은 혈세낭비이니 광역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도청도 수긍했습니다.


현재 고흥군은 "작년 남양면의 화장장 추진은 백지화하고, 고흥군 전체를 상대로 물색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남에서 고흥군만 유일하게 군립화장장을 추진 중인 셈인데, 우리는 여전히 혈세낭비라고 생각합니다.

2008.1.16

고흥군화장장반대주민대책위원회 올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카페 '고향산천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1.17 15:3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 카페 '고향산천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흥군 #남양면 #화장장 #주민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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