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의 자취가 '열 걸음에 하나 꼴'

[거문도 여행 1] 이방인이 건설한 섬 '고도'를 거닐다

등록 2008.01.19 17:13수정 2008.01.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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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거문도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을까마는 지금은 뭍에서 고작 한 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습니다. 수면 위를 떠다니는 쾌속선이 웬만한 자동차보다도 빠르기 때문입니다.

 

a 녹산 등대 거문도 초입에 선 녹산 등대가 어서오라는 듯 손짓합니다.

녹산 등대 거문도 초입에 선 녹산 등대가 어서오라는 듯 손짓합니다. ⓒ 서부원

▲ 녹산 등대 거문도 초입에 선 녹산 등대가 어서오라는 듯 손짓합니다. ⓒ 서부원

점점이 보석처럼 박힌 남해 바다 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내 거문도에 닿습니다. 맨 먼저 녹산등대가 뭍에서 온 손님을 맞습니다. 하얀 손을 내밀며 어서 오라는 듯 반갑게 손짓합니다.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거문도는 섬 자체가 방파제입니다. ‘서도’와 ‘동도’ 사이로 난 비좁은 물길을 지나면 호수처럼 잔잔한 내해(內海)가 넓게 펼쳐집니다. 거세게 일렁이던 파도도 이 안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뭍을 잇는 뱃길이 끊겨도, 웬만해서는 거문도 섬들 사이에 오가는 연락선이 묶이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을이 서로 마주 보며 내해를 감싸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도든, 동도든 바깥쪽은 오랜 세월 집채만한 파도에 깎여 수직 절벽을 이룹니다.

 

한나절이면 섬 구석구석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조그만 섬일 뿐이지만, 그래 봬도 거문도는 행정구역상 전남 여수시 삼산면의 소재지입니다. 특히 세 섬 중 가장 작은 ‘고도’는 면사무소 등 행정 관청과 상가, 식당 등이 밀집해있는 곳입니다. 관광객을 실은 배도 이곳에 닿습니다.

 

a 거문도항 전경 뭍을 잇는 여객선이 닿는 곳, 거문도 고도의 항구 모습입니다. 주변 곳곳이 숙박시설을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거문도항 전경 뭍을 잇는 여객선이 닿는 곳, 거문도 고도의 항구 모습입니다. 주변 곳곳이 숙박시설을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 서부원

▲ 거문도항 전경 뭍을 잇는 여객선이 닿는 곳, 거문도 고도의 항구 모습입니다. 주변 곳곳이 숙박시설을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 서부원

지금 거문도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대개 숙박시설을 짓거나 도로를 넓히는 등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려는 것입니다. 뭍을 오가는 배가 빨라지는 만큼 이곳의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도회지를 닮아가며 옛자취를 빠르게 지워내고는 있지만, 거문도, 특히 이곳 고도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은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받아 안은 현장으로서, ‘열 걸음에 하나 꼴’로 둘러볼 만한 유물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흔적들은 박제화하거나 삶에 유리된 것들이 아닌, 거문도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의미한 것들입니다.

 

a 거문도 중심가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건물이 많이 남은 탓에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거문도 중심가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건물이 많이 남은 탓에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서부원

▲ 거문도 중심가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건물이 많이 남은 탓에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서부원

여객선 터미널을 벗어나면 해안을 따라 거문도의 ‘중심가’를 관통합니다. 이곳 주민들의 어엿한 생활공간이지만, 언뜻 봐서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세트장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곳이라 하니 그때의 모습이 지금껏 잘 보존돼 온 것입니다.

 

a 면사무소에 남은 옛 건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로, 입구 벽면에 한글로 의사당이라는 새겨져 있어 과거 건물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면사무소에 남은 옛 건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로, 입구 벽면에 한글로 의사당이라는 새겨져 있어 과거 건물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서부원

▲ 면사무소에 남은 옛 건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로, 입구 벽면에 한글로 의사당이라는 새겨져 있어 과거 건물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서부원

그때의 일제 관청터에 지금은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고, 그곳에서 지척인 야트막한 언덕배기에는 일본 방향으로 자리한 신사(神社)가 뼈대만큼은 여전히 번듯합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관리될 만한 것들인데도 뭍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있는 이유에서인지 방치돼 있습니다.

 

a 신사 터에 남은 석등 받침돌 신사 터 오르는 계단 옆에 같은 모양의 두 개의 석등 받침돌이 남아있습니다.

신사 터에 남은 석등 받침돌 신사 터 오르는 계단 옆에 같은 모양의 두 개의 석등 받침돌이 남아있습니다. ⓒ 서부원

▲ 신사 터에 남은 석등 받침돌 신사 터 오르는 계단 옆에 같은 모양의 두 개의 석등 받침돌이 남아있습니다. ⓒ 서부원

신사로 오르는 계단에는 화려한 석등이 올려져 있었음직한 연꽃 문양의 받침돌이 남아있습니다. 신사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입니다. 거문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인의 손에 이끌려나와 이곳에서 저 바다 너머를 향해 허리를 굽혀야만 했습니다. 신사 터에 서서 둘러 본 거문도의 모습은 장쾌합니다. 높이를 잴 것조차 없는 도톰한 언덕일 뿐이지만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끝없는 수평선의 망망대해가, 서쪽으로는 서도의 연이어진 산봉우리가 하늘을 가리고 섰고, 동쪽에는 푸르디 푸른 동백숲이 빼곡합니다. 눈을 돌려 북쪽 발아래에는 바다를 기대어 살아가는 거문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a 신사 터 유적 일본 쪽을 향하고 있으며,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본 경관은 빼어납니다. 현재 사유지로, 소문에 의하면 상업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합니다.

신사 터 유적 일본 쪽을 향하고 있으며,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본 경관은 빼어납니다. 현재 사유지로, 소문에 의하면 상업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합니다. ⓒ 서부원

▲ 신사 터 유적 일본 쪽을 향하고 있으며,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본 경관은 빼어납니다. 현재 사유지로, 소문에 의하면 상업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합니다. ⓒ 서부원

돌로 된 울타리를 두른 널찍한 신사 터에는 지금 파릇파릇한 열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누가 심은 것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에게 있어 이곳은 역사 유물이 아닌 삶터일 뿐입니다. 그 흔한 안내판도 없고, 사람들에게 물어도 고개만 갸웃거리는 이곳은 거문도 사람들에게조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고도의 한 가운데에 선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이곳은 지금 사유지입니다. 듣자니까 이곳에 전망대를 겸한 상업 시설 짓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땅 주인이 이곳에 전망대를 세우려는 것도, 또 과거 일본인이 굳이 이곳에 신사를 세운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인이 들어와 살기 전에도 거문도는 이방인들의 차지였습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한다며 영국 해군이 2년 넘게 불법으로 점령한 곳이며, 이후 줄곧 이곳은 거문도가 아닌 ‘포트(port) 해밀턴’으로 불리는 운명을 겪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된 19세기 말, 서구 열강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마저 무주공산으로 여겼으니,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거문도는 아예 조정의 관심 밖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거문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서도였습니다. 영국 군항이 고도에 만들어지고, 뒤 이어 항구 주변이 개발되면서 ‘숲 반, 건물 반’의 번화한 섬으로 변한 것입니다.

 

a 영국 해군 병사의 묘 당시 사고로 죽은 병사는 아홉이었다고 전하나, 현재 전하는 묘지는 이곳 세 기가 전부입니다. 서남향의 명당자리로 발아래로 고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교가 내려다 보입니다.

영국 해군 병사의 묘 당시 사고로 죽은 병사는 아홉이었다고 전하나, 현재 전하는 묘지는 이곳 세 기가 전부입니다. 서남향의 명당자리로 발아래로 고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교가 내려다 보입니다. ⓒ 서부원

▲ 영국 해군 병사의 묘 당시 사고로 죽은 병사는 아홉이었다고 전하나, 현재 전하는 묘지는 이곳 세 기가 전부입니다. 서남향의 명당자리로 발아래로 고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교가 내려다 보입니다. ⓒ 서부원

면사무소 옆으로 난 비좁은 고샅길을 10분 쯤 걸어 오르면 거문도의 아픈 과거, 포트 해밀턴의 뚜렷한 자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 기의 영국 해군의 묘지가 그것입니다. 주둔 당시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묻힌 곳으로, 묘비의 모양이 각기 다른 만큼 시기도, 사연도 모두 다릅니다.

 

제법 가파른 곳이지만, 차분하게 햇볕이 드는, 누가 봐도 명당자리입니다. 동백나무와 유채꽃으로 에워싸인 꽃밭 한 가운데에 누워 아름답고 잔잔한 거문도 내해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공원 같은 묘지 뒤쪽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거문도는 아늑하기 그지없습니다.

 

해마다 1월 말이면 많은 영국인들이 이곳 외딴 섬 거문도를 찾아와 묘지를 둘러본다고 합니다. 정기적으로 조촐한 추모 행사도 치러지고, 언제부턴가 거문도의 아이들을 위한 장학 사업도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역사의 생채기는 어찌 되었건 인연이 되어 영국과 거문도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a 거문도 고도 전경 서도에 자리한 거문중학교에서 내려다 본 거문도 고도의 모습입니다. 숲 반 건물 반인 거문도의 중심지입니다.

거문도 고도 전경 서도에 자리한 거문중학교에서 내려다 본 거문도 고도의 모습입니다. 숲 반 건물 반인 거문도의 중심지입니다. ⓒ 서부원

▲ 거문도 고도 전경 서도에 자리한 거문중학교에서 내려다 본 거문도 고도의 모습입니다. 숲 반 건물 반인 거문도의 중심지입니다. ⓒ 서부원

분명 이 계절은 거문도 여행의 비수기입니다. 몇몇 낚싯꾼을 빼면 텅 빈 채로 오가는 쾌속선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벌써부터 봄꽃 소식이 꿈틀거리는 남쪽 끝의 섬이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칼바람은 북풍 못지않게 매서운 탓입니다.

 

그러나 섬다운 맛과 멋을 느끼려거든 관광객 북적이지 않는 지금이 제격입니다. 산책하듯, 소일하듯 차분하게 섬 이곳저곳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자 색다른 여행이 될 것입니다. 하긴 이곳의 대중교통이란 전화를 걸어야 오는 콜택시(9인승 승합차) 한 대가 전부라 웬만하면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삼호교’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숨어들고 있습니다. 내일 서도를 가자면 넘어야 할 다리입니다. 방에 누웠더니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고 끼악거리는 갈매기 울음소리만 들려옵니다.

덧붙이는 글 | 거문도 가는 뱃길은 두 갈래입니다. 전남 여수와 고흥 녹동에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간 경유지(여수 출발의 경우 나로도, 손죽도, 초도 경유)를 감안해도 여수에서는 두 시간, 고흥 녹동에서는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합니다. 비수기(겨울)에는 하루 두 편이지만(고흥 녹동은 1회), 여름 등 관광객이 많아지는 계절에는 운항 편수가 많이 늘어납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8.01.19 17:1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거문도 가는 뱃길은 두 갈래입니다. 전남 여수와 고흥 녹동에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간 경유지(여수 출발의 경우 나로도, 손죽도, 초도 경유)를 감안해도 여수에서는 두 시간, 고흥 녹동에서는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합니다. 비수기(겨울)에는 하루 두 편이지만(고흥 녹동은 1회), 여름 등 관광객이 많아지는 계절에는 운항 편수가 많이 늘어납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거문도 #겨울 섬 여행 #고도 #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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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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