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영화니 별 볼일 없을 거라구요?

[평범한 아줌마 선생의 인도여행 20]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의 강연

등록 2008.01.24 10:25수정 2008.01.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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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금요일 - 로컬 레스토랑


창문을 여니 이른 아침 공기가 오랜만에 시원하다. 돌체가 벌써 출근하나보다. 마당 끝 대문을 따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돌체! 저... 내일 모레 델리 가요!”
“뭐라구요?”
“내일 모레 아침에 델리로 내려간다꾸요!”
 
내 몸은 음식을 거의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맛나게 먹은 닭백숙까지도. 이 좋은 진짜배기 음식들을. 스멀스멀 음식이 몸 속에서 유영하다 그대로 배출되고 만다. 어쩔 것인가?

 

젬마와의 외출. 잠시 후 석류알 같이 진한 핑크색 라다키 전통의상을 입고 나타난 젬마는 오랜만에 외출인지 신나 보였다. 그녀와 손을 꼭 잡고 조금씩 걸어 나갔다. 그녀의 손은 두텁고 단단한 건강하고 믿음직한 손이었다. 골목 하나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숨이 차오고, 우산을 받치고 걸었는데도 종잇장 같은 그늘이 도끼날의 따가운 햇볕을 막아내긴 불가능했다. 걷는 것조차 무거웠다. 이곳의 볕은 정말 쨍 소리가 날 것 같이 강하고 투명한데다, 날은 연일 고온 건조해서 이곳 사람들 중 백내장에 걸린 이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물론 이곳에선 치료가 쉽지 않을 거 같다.

 

“젬마, 우리 잠시 어디 가서 뭐 좀 마시면서 쉬었다가 갈까?”
“그럼 제 친구가 있는 로컬푸드 레스토랑에 가요.”
         
넓은 노천 음식점으로, 자유분방하게 입석과 좌석 테이블이 놓여 있고 라다키 전통음식과 살구쥬스 같은 로컬푸드만을 취급하는 비교적 저렴하고 맛도 좋은데다 분위기도 편안한 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돌체가 주인으로, 식당을 오픈하자마자 6명의 라다키소녀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수익금은 라다크의 복지에 사용한단다. 돌체는 여행사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소셜 워커(social worker)로 라다키들에게 직업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우리는 커드를 주문했는데 커드는 일종의 요플레다. 시큼한 맛으로 단맛과 향신료를 가미하지 않아 맛은 별로인데 젬마가 고집하는 바람에 한 그릇을 알뜰하게 비워야 했다.

 

라다크여성연대

 

오후 3시 라다크여성연대(The Woman alliance of Ladakh)를 찾았다.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저, 녹색평론사)의 다큐영화을 보러 가는 길. 경찰서를 지나니 꾸준한 오르막길로 헉헉대다 맥이 풀어질 즈음, 왼쪽에 건물 한 채가 서 있는데, 자칫 놓치고 지나가기 쉽다. 이곳이다.

a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본관건물이구요. 왼쪽에 또 다른 건물에는 부엌과 기념품샵이 있습니다.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본관건물이구요. 왼쪽에 또 다른 건물에는 부엌과 기념품샵이 있습니다. ⓒ 신영미

▲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본관건물이구요. 왼쪽에 또 다른 건물에는 부엌과 기념품샵이 있습니다. ⓒ 신영미

  

본 건물 옆 부엌에서 일하는 라다키여인에게 물을 청하였더니 커다란 물통에서 물을 퍼 준다. 그 자리에서 “커어~!” 두 사발 거푸 들이마시니 뼈 속까지 시원하다.

a  들풀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근처 모퉁이에 이런 이름모를 들풀들이 땅에 가깝게 무럭무럭 자라고있습니다.

들풀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근처 모퉁이에 이런 이름모를 들풀들이 땅에 가깝게 무럭무럭 자라고있습니다. ⓒ 신영미

▲ 들풀 라다크여성연대 건물 근처 모퉁이에 이런 이름모를 들풀들이 땅에 가깝게 무럭무럭 자라고있습니다. ⓒ 신영미


상영실 입구에 자료집과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의 책자들 그리고 <오래된 미래>의 프랑스어판과 영문판, DVD(600루피)가 구매용으로 놓여 있다. 표지의 할머니와 손주의 웃는 모습이 언제 보아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저런! 어제 만났던 프랑스 젊은이들이 그곳에 와 있었다.

 

“오~또 만났네요. 반가워요…. 저희는 이곳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하하…. 네에, 그러셨군요. 어쩐지…. 참, 어제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어요. 이거 DVD 두 장 주세요.”

 

미리 부탁받은 정연이 몫까지 두 장 샀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접한 것은 7년 전쯤. 그다지 구체적인 동기도 없이 막연히 생태운동의 고전적 작품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볼까 정도. 그러니, 별다른 느낌도 감흥도 일지 않았었다. 어쩐지 익숙함 같기도 하고, 흘러간 옛이야기 같기도 하고. 이번 라다크여행을 마음먹으면서 다시 찾아 구절구절 곰씹어 읽었다. 의무감으로라도 읽어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러나, 읽어가는 도중 뜻밖에도 쉽사리, 머릿속이 하얗게 맑아지면서 그 위에 곱게 채색된 풍경화와 인물화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 그림들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돌았고, 라다크의 풍경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책은 살아 있었다.

 

맨 앞자리. 바로 옆에는 거의 밀다시피 반삭의 짧은 머리를 한 독일아가씨가 앉았다. 그는 내가 손에 들고 있던 한국어판 <오래된 미래>를 보더니, 관심을 나타내며 신기한 듯 책을 뒤적였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상영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이 시간에 상영하는데도 이리 많은 여행자들이 찾은 걸 보니 그것만도 희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야말로 이 시간 이후 라다크를 좀더 잘 이해하고 흩어지는 순간 자발적 홍보사절이 될 것이고, 이들이 걷는 걸음마다에 변화의 씨앗이 뿌려질 거야. 결국 변화의 힘은 사람의 뜻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까.'
 

영화상영


a 표지사진입니다. 라다크의 노인들은 쓸모없이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지내는 세월이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있음을 뜻한다. 라다크인들의 인생에는 서두를 필요가 없기때문에 이들이 느리게 일을 한다해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이들은 보통 80대까지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 이 주된 이유는 아이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이다. 이 둘은 흔히 제일 친한 친구이다.   - 오래된 미래에서

표지사진입니다. 라다크의 노인들은 쓸모없이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지내는 세월이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있음을 뜻한다. 라다크인들의 인생에는 서두를 필요가 없기때문에 이들이 느리게 일을 한다해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이들은 보통 80대까지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 이 주된 이유는 아이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이다. 이 둘은 흔히 제일 친한 친구이다. - 오래된 미래에서 ⓒ 신영미

▲ 표지사진입니다. 라다크의 노인들은 쓸모없이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지내는 세월이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있음을 뜻한다. 라다크인들의 인생에는 서두를 필요가 없기때문에 이들이 느리게 일을 한다해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이들은 보통 80대까지 활동적이고 건강하게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 이 주된 이유는 아이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이다. 이 둘은 흔히 제일 친한 친구이다. - 오래된 미래에서 ⓒ 신영미

시작 전 간소한 의식. 수더분하게 생긴 한 라다크 남자가 들어와 자리를 메워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이 영화 상영의 의미를 알렸다.

 

비디오 화면이 열리더니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과 아이들 머리 위로 찬란한 빛 세례 그리고 아낙들이 모여 낱알을 거두는 모습, 그네들의 노래소리와  뿌우우~~하며 낮고 길게 멀리 퍼지는 긴 뿔고동소리….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야크와 야크와 암소의 교배종이라는 조들의 꼬리치는 모습들. 라다크사람들의 자연스레 끄슬린 구릿빛 얼굴은 구김 없이 자연을 닮아 평화로웠고 웃음은 해맑았다. 아! 평화와 풍요. ‘인간이 삶이 수  천년간 어떠했었는지를 얼핏 본 것 같은’ 풍경들. 이미 나는 그 언저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실감나는 자료화면!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은 바뀌어, 바로 이런 풍경이 일상적이던 라다크의 옛 모습들이 사라지고 현재의 모습, 관광지로서 도시화되면서 황폐해진 모습이 등장한다. 고철, 플라스틱, 비닐로 대표되는 쓰레기더미와 영어로 도배된 티셔츠와 청바지차림의 남자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과 실업으로 배회하는 도시의 방랑자들. 
 
라다크는 1972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소개되면서 세상인의 이목을 받기 시작하고, 인도정부는 발빠르게 관광지로서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히말라야에 길이 뚫렸다. 길이 뚫리자 그 길 따라 서구의 물질문명으로 무장한 관광객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 외부로부터의 갑작스런 개방의 영향은 마른 잎 속의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면서 라다크는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이후의 그러니까 불과 30여년간의 변화는 오늘의 라다크에 무섭게 각인되어 얽혀져갔다. 다음은 이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

 

‘여기는 가난 같은 것은 없어요. -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 - 체왕 팔조르, 1983년‘ - <오래된 미래> 에서

 

화면 사이사이에 헬레나가 카메라 앞에 나와 이런 변화의 의미를 증언한다. 그녀의 표정은 침착해 보이지만 어딘가 편치 않아 보였다. 1시간 20여분의 상영시간이 모두 끝났다.
 
‘공짜영화인데 뭐. 공짜 치고 늘 신통한 거 없으셨다구요? 그러셨군요? 하지만, 공짜도 나름이랍니다. 일단 한번 보세요! 라다크를 여행하는 분들에겐 권하고 싶습니다. 레에 도착하면 우선 이 영화 한 편만 보시라구요! 그럼, 바로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곳! 이곳이 어떤 땅인지 절로 아시게 될 걸요? 네, 그렇구 말구요!’

 

헬레나와의 대담

 

그런데, 바로 이어서 헬레나가 이곳에서 와서 관객들과 대담의 시간을 갖는다는 소식.

 

‘잘 됐어. 지난 30여년 라다크와 함께 살아온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녀는 현재의 라다크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1970년대 중반, 학위 논문을 위해 라다크를 방문. 논문을 위해 꾸준히 라다크에 드나들면서, 라다크의 문화와 철학에 매료. 그러나 서구 문명의 유입 과정에서 라다크의 전통 문화와 가치관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현대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강연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86년 대안적 노벨상이라 불리는 바른 생활 상(Right Livehood Award)를 받았으며 현재 ‘에콜로지 및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의 대표로서 생태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하고 있다. - 백과사전에서 인용
                                               

헬레나는 가지런히 빗질된 긴 생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리고, 수수한 흰 옷을 입었는데, 특히 눈을 끈 것은 구릿빛인 맨발. 그 맨발은 자신의 주인을 한 유럽여성에서 라다키여성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전체적인 느낌이 DVD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고 금발이 백발이 되었다는 것만 빼곤. 나이 들어 보임은 오히려 그녀의 전체적인 이미지에 안정감을 주었다.

 

a 맨발 헬레나의 맨발이네요. 강연을 잘 듣지 않고 사진찍느라 한눈 팔고있습니다.

맨발 헬레나의 맨발이네요. 강연을 잘 듣지 않고 사진찍느라 한눈 팔고있습니다. ⓒ 신영미

▲ 맨발 헬레나의 맨발이네요. 강연을 잘 듣지 않고 사진찍느라 한눈 팔고있습니다. ⓒ 신영미

 

“자, 궁금하신 거나 질문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물어주세요.”
 
그러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레는 이미 관광지일 뿐, 특별히 라다크적인 것을 찾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라다크적인 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제3의 길이 있을까요?”
“라다크인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미 전 세계적으로 고삐 풀린 세계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과는 다른 길을 가는 ‘라다크의 실험’이 지구촌 전체에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나요?” 
“우리는 어떻게 라다크를 도울 수 있을까요?”

 

그녀는 서구 문명과의 접촉이 어떻게 라다크 전통사회를 급속하게 그리고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붕괴시켜 왔는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중에 그녀의 목울대가 잠시 울렁이기도 했던 거 같다. 아무튼, 그녀는 라다크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라다크 사람들에게 서양문물과 서양문명의 어두운 면들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고 했다. 그 결과 라다크사람들은 서양식 개발의 폐해가 라다크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앓고 있는 고통임을 인식하게까지 되었다고 했다.

 

라다크 사람들도 이제 알 것 다 알고 무척 똑똑해졌다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관광산업에 의존적인 경제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경제적 자립의 기초인 로컬경제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결국, 라다크 사람들은 허물어지는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고 그 증후는 이미 상당히 진척되고 있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자각하면서 미래의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서구를 향해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라다크 문화가, 이들의 삶의 원형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강조했다. 이들의 노력은 단지 라다크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거라고. 또 현재는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서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것이 필요함을 힘주어 말했다. 그 연대적 실천을 위해 올해 11월 20일에는 우리나라에 방문할 예정이라 했다. 훌륭한 강연이었다.

 

그녀는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함에 주저함이 없고 막힘이 없었다. 아마 수도 없이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해왔을 것이지만, 이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처음처럼 새로웠으리라. 

 

a 대담시간이 끝난 후  한 청중과 헬레나가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간이 끝나면 훌쩍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질문을 받아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대담시간이 끝난 후 한 청중과 헬레나가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간이 끝나면 훌쩍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질문을 받아주는 모습이었습니다. ⓒ 신영미

▲ 대담시간이 끝난 후 한 청중과 헬레나가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간이 끝나면 훌쩍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질문을 받아주는 모습이었습니다. ⓒ 신영미

 

관심

 

라다크여성연대를 나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떨져버리지 못했다. 뭘까? 이 허전함이란…. 그리곤, 이번에는 내 자신에게 질문한다.

 

'그녀는 과연 자신을 낳아준 서구의 시선을 실제로 얼마만큼이나 극복했을까?' 잘 모르겠다. '라다크 사람들과 함께 한 30년, 그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가 처음 순수의 땅 라다크에서 받은 그 느낌을 그대로 갖고 있을까? 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처음처럼 갖고 있을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가 서구의 학자라는 위상 덕분에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묻고 답하는 순간 이런 것들은 내겐 관심밖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관심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그녀의 학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생태운동가로서 특이한 인생여정에 있지 않았다. 라다크의 현재와 미래 운명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한두 사람에 의존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터이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은 온전히 라다크였다.

 

라다크의 문제는 라다크 사람들이 가장 절박할 것이다. 그리고보니, 저런! 이미 나는 희망의 싹을 보았던 거였다. 헬레나에게서 듣고 싶었던 바로 그것, 희망이란 실은 이미 내가 경험하고 있었던 거였다. 돌마와 젬마, 돌체, 돌체의 아버지, 이웃들, 돌마의 고향식구들과 마을사람들, 그리고 그 외 만났던 이름 모를 라다크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기분이 마구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싶다. 희망이 아직은 있으므로 기회 닿는 한 지켜보고 싶다. 라다크사람들은 깨어나고 있으므로. 물질적 풍요 이전에 ‘행복’이 우리들 삶의 목표라고 한다면 이들은 그 감각을 누구보다도 더 잘 갖고 있었으므로. 또한, 만일 라다크가 자신의 실험들을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도 결코 이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므로.'

 

a 왼쪽은 여행자들에게 주는 안내문, 오른쪽은 오래된 미래 DVD판 이 둘이 라다크 여행의 안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왼쪽은 여행자들에게 주는 안내문, 오른쪽은 오래된 미래 DVD판 이 둘이 라다크 여행의 안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 신영미

▲ 왼쪽은 여행자들에게 주는 안내문, 오른쪽은 오래된 미래 DVD판 이 둘이 라다크 여행의 안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 신영미

1. 지역문화를 존중해주세요.
 · 짧은 바지, 어깨나 횡경막뼈가 드러나는 옷을 삼가주세요. 특히 사원에서.
 · 집이나 마당에 들어설 때, 사진을 찍을 때는 묻고 허락을 받도록 하세요.


2. 플라스틱, 비닐제품을 팔 경우 사지 말고, 거절해주세요.
 · 새것보다는, 당신의 빈병을 이용하여 리필하세요.
 · 비닐이나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식료품을 사지 마세요.

3. 물을 아껴써 주세요.
 · 가능한 한 수세식화장실 대신 라다키 변소를 사용하세요.
 · 친환경 세탁방법을 사용해주세요.
 · 개울에서 바로 세수나 세탁을 하지 말아주세요.)

 

4. 에너지를 아껴주세요.
 · 가능한 한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샤워시설을 사용하세요.
 · 재생 전기에너지를 위한 시설을 지원해주세요.

 

5. 차량 사용을 절제해 주세요.
 · 가능한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함께 나눠 타세요.

 

6. 쇼핑이나 음식물을 지역의 것을 이용하여 그 지역경제를 지원해주세요.
 · 그 지역특산 공예품, 자연제품을 구입해주세요.
 · 지역 고유 식품을 먹어주세요.
 · 다국적기업의 생산품을 피해주세요.

7. 지역단체를 지원해주고, 생태적 삶에 관심과 실천을 해주세요.
· 오래된 미래나 다른 다큐멘터리를 관람해주세요. 단, 일요일은 제외.
    Spread the Word JU-LE!
  줄레-줄레(감사합니다!)란 말을 자주 사용하여 퍼트려주세요.

 

 

시장통에서

 

시장 구경을 하다 Airtel 간판을 보자 들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배탈과 설사로 이대로 있다간 정말 무슨 사단이 날 것 같다. 델리의 아시아나 항공사직원과 통화하고 15일 새벽1시 비행기표로 리컨펌했다. 그리고 서대장님의 권고대로 스리나가르로 내려올 생각에 공영버스터미널에 가서 스리나가르행 버스를 예매했다. 일정을 너무 급하게 잡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좋았다.

 

히말라야제품으로 감기약과 관절약을 몇 통 사고, 엽서, 입술 트는 데 바르는 립스틱과 살구기름을 샀다. 대부분의 로컬제품들은 포장과 용기가 단순 투박하다. 아예 광고문구란 찾아볼 수 없다. 간단한 제품 설명이면 그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포장 물건을 본다면 불량품 내지 시쳇말로 싸구려 삼류제품이라고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 하나를 사면 그 물건에 묻혀서 개인적인 공간에까지 깊숙이 묻어 들어오는 각종 현란한 문구들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끔 나는 고급제품 세련된 제품에 기가 죽을 때가 있다. 물건들의 홍수에 허우적거리면서.

 

게스트하우스 식구들

 

골목 앞에 돌체아버님이 쭈그려앉아 지나는 사람을 구경하고 계셨다. 나를 발견하시곤 오늘도 물으신다. 저녁밥 먹었느냐고. 헌데, 젬마가 배를 움켜쥐곤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젬마! 젬마! 왜 그래?”
“속이 답답해요….”
“언제부터 아팠어?”
“점심 나절에….” 
 
그러면서도 약국도 병원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아질 거란 말만 되풀이 한다. 하는 수 없이 바늘로 양손 엄지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내주었더니 겁내 하면서도 빙그레 웃기만 한다. 저녁 무렵이 되어 젬마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짜이를 마시며 인도영화를 보고 있다. 불쑥 돌체가 들어왔다. 젬마의 얼굴이 먼저 환해진다. 그러나 돌체는 역시나 지쳐있는 표정.
 
“깜짝이야. 느닷없이 나타나시는데 뭐 있으시네요. 열심히 일했군요. 오늘도.”
“네... 그렇죠...”

 

무 토막 같은 짧고 굵은 대답과 함께 철푸덕 쇼파에 몸을 던지더니, 묻는다.

 

“술 좀 하시나요?”
“저런. 전 아직 술 마실 상태 아니랍니다. 역시 비즈니스 타입이지 의사타입은 아니시군요. 젬마는 술 좀 하나요?”

 

곁에 앉아 듣고 있던 젬마가 수줍은 듯 웃기만 한다.

 

“라다키 여성은 술을 마시지 않아요.”
“그래요? 어쩐지 불공평한데요. 그런데 돌체는 술을 좋아하나 봐요?”


“네… 특히 오늘같이 피곤한 날은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게 돼죠. 오늘 관광객 데리고 엄청 투어했어요. 운전하느라 힘들었어요. 저녁도 못 먹었어요.”
“저런, 뭐 좀 먹어야겠어요. 술 말고 밥이요.”
“하하… 네…. 그러죠.”


젬마가 준비해 놓은 볶음밥과 술안주로 과일을 깎아내왔다. 백열등 노란 불빛이 방안에 낮게 깔리면서 젬마와 돌체 얼굴의 반을 가려버리고 그 자리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집에 돌아오면 무엇을 제일 원해요?”
“릴렉스죠. 하하.”


“지금 돌체는 일이 우선이죠? 집에 돌아오면 다음 일을 위해 잠시 퍼져 있는 거구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돌체에겐 뭐가 제일 중요해요? 일?”
“사실 이 일을 좋아하진 않아요. 오늘은 게다가 공항 가서 유럽인이 잃어버린 여행자 가방까지 챙겨 와야 했어요.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것이 위로가 될 지경이에요.”

 

“하지만, 누가 그렇게 바쁘게 살라했어요? 돌체 아버님은 종일 방에 누워계시면서 사람냄새를 그리워하시는 거 알아요? 젬마는 배가 아파 식사도 못했어요.”
“…….”


“제가 너무 한가한 투정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하하하… 됐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님과 젬마 제겐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의 표정이 겨우 좀 진지해지고 있었다. 젬마에게 뭐라 라다키말을 건네는 거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연스레 돌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돌체는 그런 그녀를 위로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곳도 자본주의 바람이 불어서 예전의 라다키들의 삶의 가치가 도전받고 있지 않나요? 이제는 다들 돈 벌려고 노력하잖아요? 돌체씨도 게스트하우스에, 식당에, 여행사 운영에… 그래서 바쁜 것이구요.”

“네… 변화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겐 돈 버는 거 자체가 목적은 아니에요. 돈? 관심 없어요. 로컬푸드 레스토랑 운영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아요. 하루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 나오는 게 고작이에요. 인도영화 좋아해요?”

 

“나름대로 매력 있는데요. 생각보다 무척 화려하네요. 여러 가지로.”
“전 저런 인도영화 뭐 재미는 좀 있지만… 글쎄요. 만일 저 배우들이 이곳에 오면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진 않아요.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해요. 그들은 과도하게 사치스런 것들이 쓸모없다는 걸 모르니까요.”

 

밖으로 나왔다. 별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빛나고 있다. 미루나무 사이로 별들이 보인다. 오늘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소원을 빌지 않으려 한다.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했다. 별들의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이제 좀 눈에 익으려는 데 이곳의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무심한 편이 낫겠다싶다. 젬마의 속앓이가 가라앉지 않아 걱정이다. 염주알을 꺼내어 돌려본다.

 

“옴마니 밧메홈… 옴마니 밧메홈….”

2008.01.24 10:25ⓒ 2008 OhmyNews
#인도여행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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