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남쪽 이즈하라항구에 있는 ‘대마도 방문 환영’ 문구. 조선통신사 행렬이 그려져 있다.
김종성
과거에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체 정권을 유지했다. 길이는 거의 제주도만하지만 면적은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대마도가 한·일의 중간에서 독립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일 간의 ‘힘의 균형’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의 균형이란 국력의 크기가 똑같았다는 게 아니라, 대마도가 상대방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할 만큼의 힘이 양쪽 지역에 모두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균형이 존재했기에 작은 섬 대마도가 한·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봉과 식량원조를 받으면서 조선을 상국으로 대한 대마도가 끝내 조선 영토로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같은 힘의 균형 때문이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또 다른 힘이 일본열도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균형은 항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힘의 균형이 파괴되면,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은 어느 한쪽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마도를 사이에 둔 한·일의 역학구도가 파괴된 적이 몇 번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상황이 그러했다.
조선 전기에 한반도에는 조선이라는 통일국가가 존재했지만, 일본열도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었다. 조선이 태평성대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일본열도에서는 1467년부터 1590년까지 길고 긴 내분의 시대가 계속되었다(센고쿠시대 혹은 전국시대).
이 시기의 일본열도에서는 다이묘(지역 지도자) 간에 세력 다툼이 벌어졌고 하극상 풍조가 무사계층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해서 혼란을 종식시키기 전까지 일본은 내분의 극복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열도 안에서 그 같은 장기간의 내분이 벌어졌으므로, 이 시기는 대마도를 사이에 둔 힘의 균형이 파괴된 때에 해당한다. 시소는 분명히 한반도 쪽으로 기울였다. 이치대로라면, 이런 경우에는 대마도가 조선왕조의 영토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해협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다 한들 조선만한 규모의 나라가 대규모 원정대를 연이어 파견한다면,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편입되지 못한 이유는?고려 말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몇 차례의 대규모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한반도는 어떻게든 대마도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 수군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때까지는 조선군이 해양에서만큼은 일본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예컨대, 우수한 해선과 해전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일본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인 해군을 양성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일본군’이란 관념이 형성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 이후였다.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왜구가 준동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일본 내에 통일적 중앙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일본에서는 육군을 배로 실어 나른다는 관념은 있었어도 배를 타고 해상에서 적과 싸운다는 관념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조선 수군을 압도할 만한 해군력이 부산 동남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열도도 그렇고 대마도도 그러하다.
이처럼 조선의 해군력이 일본열도나 대마도를 능가하고 있던 상태에서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일본열도가 100년 이상의 내분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보다 더 강력한 대마도 정벌을 추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