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 한 달, 바쁘게 달려오긴 했지만...

[取중眞담] 무시된 '현장의 제언'과 인수위원들의 '오만'

등록 2008.01.27 12:55수정 2008.01.2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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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조직개편안과 관련해 24일 희망제작소가 주최한 긴급토론회에 박재완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 팀장이 참석해 인수위 입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팀장 오른쪽이 이날 발제자로 나선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 ⓒ 남소연

정부조직개편안과 관련해 24일 희망제작소가 주최한 긴급토론회에 박재완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 팀장이 참석해 인수위 입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팀장 오른쪽이 이날 발제자로 나선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 ⓒ 남소연

 

# 장면1

 

지난 24일 오전 서울 안국동 소재 <희망제작소>(이사장 김창국) 회의실. 최상용 전 고려대 교수(희망제작소 상임고문)의 사회로 정부조직개편안 관련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이 예정된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의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오전 10시 토론회가 시작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정부혁신·규제개혁TF 팀장을 맡고 있는 박 의원은 현재 국회에 제출된 정부조직개편안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사다.

 

이날 기조발제는 원로 행정학자로, 특히 정부조직분야 연구의 국내 최고권위자인 김광웅 전 서울대 교수가 맡았다. 행정학자 출신인 박의원으로서도 대선배인 셈이다.

 

김 교수는 박 의원의 빈 자리를 한번 바라본 뒤 "여기 인수위에서 나오신 분 계세요?"라며 청중을 둘러봤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실망한 표정의 김 교수는 "박재완 의원이 계셔서 들어야 되는데 안타깝다"면서 발제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이날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은 출발부터 잘못됐다"며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80년대부터 역대 정부의 조직개편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이 분야의 최고권위자다운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김 교수는 "이런 개편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면서 "가는 길과 방법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데 장본인이 안 계시니 어떻게 전달될지 걱정된다"고 거듭 박 의원의 빈자리에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말을 맺었다.

 

박 의원은 김 교수의 발제 후에도 2명의 토론자가 발언을 마친 뒤 11시 가까이 돼서 모습을 나타냈다. 마이크를 잡은 박 의원은 "늦게 참석해서 미안하다"고 운을 뗀 뒤 "토론회 참석 수락할 때 좀 늦겠다고 말씀을 드렸다"며 양해를 구했다. 이후 미리 배포된 김광웅 교수의 발제문을 토대로 반론을 펴나갔다. 그러나 토론회는 이미 김이 빠져 있었다.

 

# 장면2

 

지난해 12월27일 오후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8층 다산홀. 윤영관 서울대 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가 이끄는 <한반도평화연구원> 주최로 '신정부 남북경협의 방향과 정책추진과제'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세미나가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북정책 브레인으로 알려진 남성욱 고려대 교수(북한학과)가 토론자로 참석한다고 예고됐기 때문. 남 교수는 인수위에 외교통일안보분과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남 교수는 이날 세미나가 시작된 지 무려 2시간여가 지나 마지막 토론자가 발언을 마칠 때쯤 나타났다. 그는 "인수위 박진 간사와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누느라 늦었다. 여기 참석하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해서…"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남 교수는 이어 이날 주제는 아예 무시한 채 당시 일부 언론에 보도된 '통일부 폐지론'을 거론하면서 "통일부 참 답답하다. 다른 부처들은 여러 선을 대서 자기 부처 어려움 이야기하고 그러는데 통일부는 오늘도 (남북)회담하러 다니고,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때가 이런 때니까 일단 살아남아야지, 살아남아서 경협방안도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 북한과 회담이 그렇게 우선적이고 시급한 것이냐"며 시종일관 통일부에 '눈치껏 행동해줄 것'만 주문했다.

 

이날 세미나는 지난 정권들의 대북정책 공과를 돌아보고 차기 정부에 올바른 정책제언을 하기 위해 마련된 것. 진보-보수 성향의 연구자들이 비교적 균형 있게 참여했고, 공들여 준비된 연구논문들이 발표됐다.

 

윤영관 교수는 참여정부 초대 외교장관 경험을 토대로 정권 초기 북한의 예상되는 행동과 이의 대응 시 유의할 점 등에 대해 생생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세미나의 비중도, 그 내용에도 남 교수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듯했다.

 

30%의 대통령

 

인수위가 출범한 이래 지난 한 달 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런 장면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기자가 직접 경험한 것이 이 정도이니 유사한 사례가 얼마나 더 많았을까.

 

물론 인수위 관계자들은 바쁘다. 두 달 동안 현 정부가 벌여 놓은 일의 옥석을 가려서 새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려면 분초를 쪼개서 써야 할 입장이다. 몇 시간씩 진행되는 세미나나 토론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달라는 요구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자세'다. 인수위 내부에서 연구와 토론을 통해 새 정부의 방향과 과제를 잡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정치'의 출발이다.

 

정권을 잡고 보면 흔히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세미나를 해도, 밥 먹고 술을 마셔도, 운동을 해도,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이 편하고 즐겁다. 하지만 거기서 역사의 비극이 잉태됨을 역대 정권에서 익히 보아왔다.

 

이 당선인이 얻은 1150만 표는 헌정사상 최대 표차지만, 전체 유권자를 놓고 보면 30%를 겨우 넘는 지지임을 잊어선 안 된다.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들만을 바라보고 향후 5년간의 국정 청사진을 만들어 나간다면 실패는 이미 예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김광웅 교수나 윤영관 교수처럼 나름대로 한 분야에서 최고봉을 이룬 학자들에게 이런 식이라면 다른 연구자나 시민단체들이 어떤 취급을 당할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과연 바빠서 미처 못 챙기는 것일까, 인수위원들의 '오만'일까.

 

"300일처럼 달려온 30일", 그러나...

 

인수위 관계자들은 26일 출범 한 달을 맞아 꿀맛 같은 하루 휴식을 가졌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지나 30일을 300일처럼 일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실 인수위가 지난 한 달간 '바쁘게' 달려온 것은 평가할 만하다.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회의가 시작되고, 휴일도 없이 꼬박 한 달을 강행군 해왔다. 점심시간은 1시간을 넘기지 말고, 반주를 곁들이지 말라는 당선인의 지시도 대체로 잘 지켜지고 있다.

 

내부에 '우리를 회사원 취급하느냐'라는 볼멘 목소리도 있지만, 정치에 기업마인드를 접목시킨 것은 공직사회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사회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던졌다는 점에서 긍정성이 더 커 보인다.

 

하지만 바쁘다고 다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바깥과의 문을 닫아걸고, '오만'과 '편견'으로 뭉쳐 있어서야 바쁘면 바쁠수록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지난 한 달의 과정은 그럴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부조직개편안의 추진과정, 대학입시 자율화와 영어 공교육 개편 계획을 둘러싼 논란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인수위원들은 이제 좀 여유를 가지시라. 여유를 갖고 반대자의 목소리, 중간지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라. 지금은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는 것보다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남은 한 달 간은 휴일엔 쉬면서 생각할 시간도 갖고, 각종 시민단체와 연구단체들이 주관하는 세미나·토론회에도 찾아가서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누기 바란다.

2008.01.27 12:55 ⓒ 2008 OhmyNews
#이명박 인수위 #박재완 #김광웅 #남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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