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싱글시대 13

대학에 입학하고 2년간

등록 2008.01.28 08:22수정 2008.01.28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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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름은요?”
그녀는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말해도 모를 거요, 문욱이라고…”
“들어보진 못했어요. 그럼 내신 책은?”
“아직은 무명이라…”
“무명작가가 더 멋있어요. 왠지 겨울남자 같고.”
“그래요. 내가 바로 겨울남자요. 이렇게 미인이 타준 따끈한 커피가 필요한.”
“후후후”
그녀는 나의 속임수를 그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나는 겨울숲에 두 번째 들어갔을 때, 그리고 초희를 두 번째 만났을 때 맥주를 마셨으며, 그녀는 나의 옆에서 술시중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날 상고 동기인 임길덕이 근무하는 S은행 본점엘 들렀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때였습니다. 임길덕이 S은행에 근무한 뒤로 두 번째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임길덕을 찾아간 것은 그보다 며칠 전의 점심시간 때였습니다.
“뭐 먹을래?”
“너 잘 가는 데 가자.”
“음… 알았어.”
임길덕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명동에 흔한 대형 경양식집이었습니다. 레스토랑 ‘태양의 거리’. 앉을 자리가 드물 만큼 손님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곧 미니스커트를 입은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습니다.


“비프스테이크 둘이요.”

그런데 잠시 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복도를 사이에 둔 옆자리에 예의 웨이트리스가 음식을 날라다 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녀가 몸을 조금 구부렸기 때문에 미니스커트가 엉덩이 중간 부위까지 올라갔는데, 민망스럽게도 그녀는 반투명한 살색의 팬티스타킹만 입었을 뿐 팬티를 속에 입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경양식집에 손님이 들끓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거의가 남자 손님들이었습니다. 나와 임길덕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런 경양식집을 소개한 임길덕을 내가 며칠 뒤의 퇴근시간에 다시 찾아간 이유는 그럴 듯한 한 잔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데 갈까?”

임길덕은 신사복 상의를 입고 나오면서 나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듯이 말했습니다.
“룸살롱?”
“어때?”
“좋긴 한데, 술값이 꽤 되잖아.”
“아무리 말단 은행원이라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데 가서 마셔야 되는 것 아니겠어? 그렇지 않아도 한참 그런 분위기에 굶주려 있었는데, 오늘 내가 마침 잘 온 거야. 이왕이면 소설 쓰는 친구와 그런 데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임길덕은 나를, 무명인 대로 소설가로 인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춘문예 준비를 한 데다, 이미 소년 일간지의 동화작가들이 발표하는 지면에 자신이 고등학생임을 속이고 동화를 발표함으로써 교내의 명물로 떠올랐던 과거 때문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김유정이 이상을 두고 ‘작가는 모름지기 교만(驕慢)해야 한다’며 극찬한 것을 빌려, 그 어려운 한자까지 칠판에 써가며 나의 소신을 학우들에게 알리곤 한 데다, 졸업할 때쯤해서는 아예 ‘장래의 위대한 작가 문욱’이라는 명함까지 만들어 3학년 모두에게 돌릴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그 순간 나의 머리에 반짝 하고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초희의 얼굴과 ‘겨울숲’의 아담한 분위기였습니다.
“파트너는 예쁘고 술값은 싼 데가 이 근방에 있는데, 내가 한 번 소개해 볼까?”
“얼마나 싼데?”
“기본이 3만 원이야. 팁도 5000원이면 되고.”
“두 사람 다?”
“아니. 한 사람 팁만.”
“그럼 네 팁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 마라.”
“그래? 가자. 마시고 나서 여유가 되면 내가 부담할게.”


잠시 후 두 사람은 ‘겨울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초희가 자기 애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나를 몹시 반겨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곧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룸으로 안내되었고, 나의 옆에는 초희, 그리고 임길덕의 옆에는 미스 마가 각각 앉았습니다.


“이분은 친구분이세요?”
초희가 물었습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생. 1학년 때 연합고사 성적순으로 이 친구가 반장이 됐고 내가 부반장이 됐었지.”
“후훗. 연합고사 성적순이요? 그럼 공부를 잘했겠네요.”
“지금은 S은행에 다니고 있지.”


술은 맥주, 안주는 과일.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분이 좋아진 임길덕은 맥주를 더 시키고 마른오징어 안주를 추가했습니다. 시간은 더 흘러갔고 술값은 이미 기본 외에 2만 원을 넘어섰으며, 그 사이에 초희는 나를 ‘자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자, 임길덕이 그만 일어서자고 말했습니다. 어느덧 술값이 떨어진 모양이었습니다. 임길덕은 미스 마에게 팁 5000원을 건네주고 나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한테도 차비 밖에 없는걸.”
나는 초희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바지주머니를 뒤지는 척했습니다. 낡은 1000원 권 지폐가 한 장 나왔습니다.
“자기, 그냥 가요. 난 자기가 와준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초희는 나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마도 ‘소설가는 가난하다’는 걸 정설(定說)로 인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미안한걸.”
“괜찮으니까 커피라도 마시러 자주 와요.”
“고마워.”
“나는 자기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초희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내가 세 번째 ‘겨울숲’을 찾아간 것은, 그리고 비로소 두 사람이 젖은 키스를 나눈 것은 내가 S예술대학 문예창작과의 실기시험과 면접시험을 치르고 난 지 불과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또 오실 걸로 믿고 있었어요.”
초희는 예상대로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밤색의 한강 담배를 왼손으로 살짝 빼내고서 대답했습니다.
“오고 싶었어.”
“후후후.”
밉지 않게 웃는 초희의 갸름한 양 볼에 작은 볼우물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볼우물에서 눈을 떼기가 싫어졌습니다.

2008.01.28 08:22 ⓒ 2008 OhmyNews
#싱글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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