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영조
MBC
사도세자의 비극이 생기게 된 이유를 찾는다면 조선 숙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던 숙종 시기에 조정에서의 두 세력의 대립 원인은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의 갈등이었다.
숙종은 자신의 두 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이 기용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말년에는 장희빈을 죽이고 갑술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몰락시킴으로써 서인의 득세를 용인하여 주고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던 세자(장희빈의 아들로 훗날 경종)를 배척했는데, 그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기원이었다.
원래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최숙빈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박명빈의 아들 연령군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인들에게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맡긴다는 유조를 남기고 승하를 하게 된다.
이에 서인들은 이를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보위를 넘기고자 하는 숙종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로 왕위에 오른 세자인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도 이 경종을 두고 두 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 그것이다.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등극경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마저도 들어주게 된다. 갓 등극한 왕에게 이복 아우를 왕세자도 아닌 왕세제로 책봉하게 한 것은 명백하게 현재의 임금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이어지는 대리청정의 요구는 현 임금에게서 나오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경종 등극 2년까지 왕세제 연잉군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던 노론에 맞서 소론이 반격을 시작하는데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주장이 왕권을 무시한 반역이라 규정하며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한 1722년의 '신임사화'가 그것이었다.
이 사화로 노론과 연잉군은 큰 고비를 겪게 되고 소론이 잠시 득세하게 되지만 아우를 사랑하는 경종의 마음을 움직인 연잉군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2년 뒤인 1724년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연잉군은 영조로서 등극하게 된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똑같이 기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당연히 그와 생사를 같이 했던 노론과 함께 하였고 소론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탄생과 부자간의 반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