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데 끝나버렸다

[도전! 이기자]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제10편(완결)

등록 2008.01.29 15:33수정 2008.01.2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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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지난 27일) 아침, 따사로운 햇살에 눈부셔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를 찾았다. 반쯤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2분. '뭐야, 이제 이것밖에 안 됐어.'


무거운 머리를 다시 베개에 파묻었다. 어젯밤, 잠들 때까지만 해도, 눈만 감으면 24시간은 족히 잘 것 같았는데. 고작 6시간 남짓에 그쳤다. 게다가 휴일인데 말이지. 머리는 긴장이 풀렸는데, 몸은 아직 아닌가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허벅지가 움찔거린다.

 

지난 26일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최종검정을 치렀다. 지난 10일 동안 받은 모든 훈련에 대한 종합 테스트다. 훈련으로 보낸 시간만 모두 50시간, 하지만 테스트 시간은 채 4시간이 안 걸렸다. 이동 시간,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개인당 많아야 20여 분. 좀 과장하면, 정말 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데 끝나버렸다. 공허하다. 후련하기보단,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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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마크 ⓒ 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마크 ⓒ 대한적십자사

 

오전 9시, 서울 성동구 마장동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4층 대강당. "모두 50문젭니다. 문제를 푼 다음에 OMR카드에 검정색 볼펜으로 까맣게 칠하세요" 늦게 온 사람들을 기다리다, 10여 분 뒤 시험을 시작했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앞뒤로 살폈다. 중고등학교 때 봤던 시험지 크기 종이 양쪽에 문제가 빼곡했다.

 

그림도 몇 있었다. 다시 첫 장으로 넘겨,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다섯 문제 정도는 순탄했다. 상식으로도 충분히 풀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아리송한 문제들이 줄곧 이어졌다.

 

문제는 안 어려운데, 답 1~2개가 헛갈리는 그런 느낌, 딱 그렇다. 일단 문제 앞에 별표를 해둔 뒤, 다음 문제로 '패스'(pass). 다음도 문제 패턴은 비슷했다. 쉬운 문제 4~5개 뒤, 아리송한 것 2~3개. 뒷장까지 한 번 쫙 푼 다음, 별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하략)." 이런, 무려 20개나 됐다.


합격하려면 적어도 70점을 넘어야 한다. 모두 50문제이니, 문제당 2점씩. 만약 15문제 넘게 틀리면, 곧바로 '컴백홈(come back home)'이다. 그런데, 별만 20개라니. 큰일 났다. 10여 분 뒤. "자~ 마무리해주세요. 5분 뒤에 시험지 걷습니다" 감독관이 시간을 재촉했다.

 

남은 별을 하나씩 없애나갔다. 대부분 처음에 생각했던 답으로 과감히 질렀다. 많은 문제를 찍을 때는 이 방법이 최고다. 초·중·고를 거치면서 몸소 터득한 나름의 비법이다. 5분만에 10문제 정도를 쓱쓱 칠하곤, 밖으로 나왔다. 밖은 먼저 나간 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야~ 그거 답 뭐지?" "이런, 정말 그거야?" "으악~ 안 돼. 벌써 틀린 것만 5개째야."


애써 손을 귀를 틀어막았다. 괜스레 신경 썼다가, 실기를 망치면 안 된다.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게 최고다. "자~ 얼른 잠실로 가자! 빨리빨리~ 출발!" 등을 떠밀다시피해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50분쯤, 잠실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했다. 집합 시간(11시 30분)까지는 4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오후 테스트를 대비해,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햄버거 가게로 갔다. 다들 배고팠는지, 죄다 가게 안에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햄버거 하나로 간단히 주린 배를 채웠다. 여기서 팁(tip) 하나. 이 때 꼭 뭐라도 먹어라. 시험 시간은 짧지만, 한꺼번에 많은 것을 하기에 배가 허하면 힘을 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올라온다. 목구멍을 타고.


정오쯤, 곧바로 실기 테스트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31명(총 36명에서 5명이 자체검정에서 떨어졌다)을 두 팀을 나눠 진행됐다. 각 팀마다 다른 지사에서 파견 나온 강사가 2명씩 나뉘었다. 우리 팀이 선두였다.

 

"저는 경기지사에서 여러분의 최종 실기 테스트를 하러 왔습니다. 테스트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부터 시작할게요. 뭐부터 할까요?" 검정요원의 질문에 한결같이 "바벨이요"라고 답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가장 힘든 것부터 먼저 끝내야 부담이 덜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좋아요. 바벨부터 시작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스트는 시작됐다.

 

채점은 한 번에 두 명씩 치러졌다. 먼저 자기번호와 이름을 크게 외친 뒤,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물에 뛰어들면 된다. 이 때 주의할 점. 목소리를 크게 해야 한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애들을 채점하러 멀리서 왔는데, 물어봐도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강사는 설명했다. 평가는 객관적이겠지만, 역시 실기에서는 기분이라는 플러스알파를 완전 무시할 수도 없다.


방식은 자체검정 때와 같다. '다리벌려들어가기'로 입수, 25m를 헤드업자유형으로 간 뒤, 물 속에 잠긴 바벨을 들고 나와 역가위차기로 돌아오면 된다. 연습을 많이 했던 터라,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을 풀지 않은 탓이 큰 것 같았다. 5kg 바벨이 50kg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다리였다. 역가위차기를 하는데도, 몸이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훨씬 덜했다. 그래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무리하게 움직였을까. 허벅지 쪽에 약간 찌릿 하는 통증까지 느껴졌다.

 

여기서 정보 둘. 최종 테스트 전, 몸 푸는 시간은 없다. 워밍업? 꿈도 꾸지 마라. 하다못해 체조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험 전 알아서 몸을 풀고 들어오는 게 좋다. 차라리 샤워할 때 가볍게 몸을 풀고 들어와라. 그래도 시험은 시험인가보다. 꾸역꾸역 물 먹으면서도, 반대편에 도착했다.


다음은 '잠영'. 쉬는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시작. 이번엔 4명씩 시험을 치렀다. 순서가 4번째여서, 숨고를 틈도 없이 출발선에 섰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에 출발하려는데, 선뜻 나서질 못했다. 바벨할 때 놀랐던 심장이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크게 숨을 골랐다. 여기서 서둘렀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강사가 "준비된 사람부터 출발하라"는 얘기도 하니 여유를 갖고 숨을 골라야 한다.


드디어 출발. 힘껏 벽을 내딛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숨이 진정됐긴 했지만, 최상은 아니었다. 절반쯤 갔을 때였다. 앞을 잠깐 내다봤는데, 벽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앞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잠영은 심리적인 영향이 더 커, 긴장을 하게 되면 제 실력을 못내는 경우가 많다.

 

입 안에 있던 숨을 조금씩 뱉으며, 앞으로 향했다. 그 순간, 잠영 비법이 생각났다. "'이'하고 습~습~" 곧바로 따라했다. 이빨 사이로 조금씩 물을 들이마셨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견딜 만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2~3m는 족히 더 가는 것 같았다. 3~4번 마셨을 때쯤, 눈앞에 떡 하니 벽이 놓여 있었다. '해.냈.다'


자리에 돌아와 5m 풀 옆 바닥에 앉았다. 성공한 이들 상당수가 "평소보다 숨이 막혀 자칫 포기할 뻔했다"고 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동기를 지켜봤다. 순간, 멀리서 한 명이 중간에 물 밖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실패다. 평소 같으면 쉽게 해냈을 아이다.


10분 정도 휴식 뒤, 구조 영법을 봤다. 맨몸구조 2개, 장비구조 2개, 막기, 풀기 각각 1개씩, 모두 6개를 테스트한다. 물론 익수자는 강사들이다. 구조법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약간 진행 속도만 빨랐을 뿐,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나 주의할 점은, 목소리를 크게 내라는 것뿐. "전방에 익수자 발견!" 물에 뛰어들기 전에는 항상 이 말을 외쳐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물어물 넘어가기 쉽다. 한 강사에 따르면, 목소리도 채점 항목에 들어간다고 한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이왕이면 목이 터져라 외쳐라. 떨어지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


구조법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 응급처치법만 남았다. 시험은 수영장 안에서 치러졌다. 남자 탈의실 바로 옆 움푹 들어간 곳에 실습용 인형 애니(Anne) 4개를 기다랗게 깔아놓고 했다. 테스트 방법은 이렇다. 검정요원이 상황을 설명하면 그게 맞는 응급처지를 하면 된다. 예컨대, "40대 남자 어른이 쓰러졌다. 맥박은 있는데 호흡은 없다. 응급처지 1분 동안 실시" 같은 식이다. 그러면 곧바로 연령에 맞는 구조호흡, 심폐소생술 가운데 하나를 골라하면 된다. 1차 실습 테스트가 끝나면 면접이 이어진다.

 

방식은 개별 또는 집단(4명) 면접인데, 응급처치법에 관한 내용을 물어본다. "성인 구조 호흡 때 불어넣는 공기의 양은?" "영아 심폐소생술 때 손가락으로 누르는 깊이는?" "어린이 기도 확보는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 등. 질문을 던지면, 곧바로 3초 안에 대답해야 한다.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될까? 아니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한다. 이럴 땐 정치인식 대답이 최고다.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이어, "아~ 배웠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는 게 포인트.


이것으로 모든 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결과는 아직 모른다. 다음 주 수요일(30일)쯤, 홈페이지에 오를 예정이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 시계를 봤다. 오후 3시 37분. 31명 모두가 다시 의무실 옆 자리에 모였다. 첫날 테스트를 치렀을 때 모였던 바로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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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2008년 1기 수강생이 지난 26일 최종검정을 마치고 난 뒤 잠실 종합운동장 제1수영장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 조혁진

대한적십자사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2008년 1기 수강생이 지난 26일 최종검정을 마치고 난 뒤 잠실 종합운동장 제1수영장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 조혁진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불과 10여일 전이다. 정확히 따지면 12일이다. 그때는 얼굴도 모르던 '남'이었지만, 어느덧 '우리'가 됐다.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2008년 라이프가드 1기 동기가 됐다. 모두를 카메라 앞으로 불렀다. 부족한 우리를 가르치느라 고생한 강사도 함께 했다. 소중한 만남, 오랫동안 함께 했으면 좋겠다.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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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2008년 1기 수강생들이 지난 26일 최종검정을 마치고 잠실 종합운동장 제1수영장 앞에서 기념 단체사진을 찍었다. ⓒ 조혁진

대한적십자사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2008년 1기 수강생들이 지난 26일 최종검정을 마치고 잠실 종합운동장 제1수영장 앞에서 기념 단체사진을 찍었다. ⓒ 조혁진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도전! 이기자]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시리즈를 함께 한 독자께 감사드린다. 댓글로 힘을 북돋아준 블로거들, 고개 숙여 고마움의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1기 동기. 이들이 없었더라면 훈련도, 연재도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아, 민아, 희재, 은지, 한나, 은상, 은영, 은애, 민재, 영규, 노아, 성일, 수민, 우현, 현유, 기홍, 대인, 상태, 정호, 은석, 범준, 지웅, 종현, 하늘, 승우, 환걸, 용식, 지수, 순혁, 상용, 인규, 윤호, 혁진, 효진, 정수, "고맙다, 동기들아. 그리고 고생했다."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1.29 15:3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그동안 '[도전! 이기자] 수상인명구조원(라이프가드)' 시리즈를 함께 한 독자께 감사드린다. 댓글로 힘을 북돋아준 블로거들, 고개 숙여 고마움의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1기 동기. 이들이 없었더라면 훈련도, 연재도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아, 민아, 희재, 은지, 한나, 은상, 은영, 은애, 민재, 영규, 노아, 성일, 수민, 우현, 현유, 기홍, 대인, 상태, 정호, 은석, 범준, 지웅, 종현, 하늘, 승우, 환걸, 용식, 지수, 순혁, 상용, 인규, 윤호, 혁진, 효진, 정수, "고맙다, 동기들아. 그리고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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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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