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두 나라 잡지를 만나는 헌책방

[헌책방 나들이 142] 서울 용산, <뿌리서점>

등록 2008.01.30 11:20수정 2008.01.3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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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헌책방 책탑 누구 눈에는 비좁게 잔뜩 쌓인 종이뭉치로 보일 책탑. 누구 눈에는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하는 보물덩어리가 가득가득 넘치는 책탑.

헌책방 책탑 누구 눈에는 비좁게 잔뜩 쌓인 종이뭉치로 보일 책탑. 누구 눈에는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하는 보물덩어리가 가득가득 넘치는 책탑. ⓒ 최종규

 (1) 샛장수

 “많이 했는가?”
 “없어요. 비가 와서.”


서울 용산에 자리한 헌책방 〈뿌리서점〉 앞에 샛장수 아저씨들 여럿이 모여 있습니다. 모두들 고물상과 파지간을 돌며 ‘버려진 책’을 오토바이 가득 실어 왔습니다. 〈뿌리서점〉 아저씨는 부지런히 이 ‘버려진 책’을 헤집으며 당신이 사들일 만한 책이 무엇일까 헤아립니다.

당신이 사들일 만한 책은 한쪽에 놓고, 당신으로서는 살 수 없어서 버려야겠다는 책은 다른 한쪽에 놓습니다.

이러는 동안 〈뿌리서점〉 책손은 아저씨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어떤 책을 고르고 안 고르는가를 살핍니다. 책손들 마음에 드는 책이 이때 보인다고 하더라도, 〈뿌리〉 아저씨가 샛장수한테 사들여서 귓등에 꽂아 놓은 연필로 책등 아래쪽에 슥슥 책값을 적어 놓을 때까지는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벌써 서른 몇 해 동안 지켜져 온 말없는 다짐입니다.

 “(샛장수 아저씨가) 계속 오네. 또 오네. 저기. 마지막 아저씨여. 밥도 못 먹고 하네. 밥을 먹어야 사는데.”
저 멀리 오토바이 소리 부르릉 나면서 다른 샛장수 아저씨가 〈뿌리서점〉을 찾아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쉴 틈이 없이 바쁘니 걱정이 됩니다. 책이 부지런히 들어와 주는 일은 좋지만, 밥때를 거르면, 아저씨 나이를 생각했을 때 걱정이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뿌리〉 아저씨는 당신을 찾아온 샛장수 마지막 물건까지 다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들어가서 저녁을 드시는걸요.


 (2) 쉬게 해 주는 책

 .. 그때 이 일기장을 부둥켜안고 “형님은 갔으나 내가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형님의 이상이었던 세계 일주 여행을 함으로써 소원을 풀어 줄 양으로 세계 지도를 벽에 붙이고 공상에 잠기며 ..  (8쪽)


<김찬삼-끝없는 여로>(어문각,1962)라는 책이 보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세계여행가 김찬삼’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첫 책이 이 <끝없는 여로>가 아니었을는지. 1962년 1월 10일에 첫 쇄를 찍은 이 책은 1965년 6월 10일에 16쇄를 찍습니다.

a 끈올 묶인 책 세상사람 숫자만큼 세상 책은 참으로 여러 가지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끈올 묶인 책 세상사람 숫자만큼 세상 책은 참으로 여러 가지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 최종규


.. 이번 여행을 돌이켜보건대,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는 기쁨도 그지없었읍니다만, 그 반면에 눈물 흘린 때도 여러 번 있었읍니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낯선 나라 사람끼리 민속 의식을 초월하여 세계의 비극에 공감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사람은 분명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읍니다. 이 발견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읍니다 ..  (9쪽)

책 겉종이가 없어 아쉽지만, 아쉬운 대로 집어 보는 <끝없는 여로>. 누렇고 두꺼운 종이로 된 양장판 책. 겉을 다시 보니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참말로 이이는 한푼 없이 세계 나들이를 했을까? 떠나는 비행기 삯과 돌아오는 비행기 삯만 들고? 아니면 떠나는 비행기 삯만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중앙일보사,1973)를 봅니다. 이 책은 〈중앙일보〉에 실렸던 글을 묶었는데, 서은숙, 신일선, 이향란, 박진, 정구충,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날을 죽 돌아보면서 적어내려간 글을 모았습니다. 다섯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신여성교육’, ‘무성영화시대’, ‘명월관’, ‘동양극장시절’, ‘인술개화’로 1970년대에 1920∼30년대 우리 삶터를 돌아본 이야기입니다.

.. 그런데 이 주삼환 씨가〈장한몽〉을 반쯤 촬영하다 말고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주연배우가 도망을 갔으니 촬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으므로 불가분 수일 역을 대신 뽑아야 했다. 여기에 등장한 사람이 조선일보 기자로 있던 심훈 씨였다. 그는 당시 드물게 보는 미남으로 그후〈상록수〉라는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장한몽〉은 꽤 인기를 끌었지만 수일이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져 관객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희비극을 낳기도 했다 ..  (74쪽)

a 책들을 보며 어떤 분들은, 헌책방 <뿌리서점>에 들어오면 책이 너무 많이 쌓여서 질린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꺄아 소리를 내면서 이곳저곳 뒤지고 헤집으며 시간 가는 줄 몰라 합니다.

책들을 보며 어떤 분들은, 헌책방 <뿌리서점>에 들어오면 책이 너무 많이 쌓여서 질린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꺄아 소리를 내면서 이곳저곳 뒤지고 헤집으며 시간 가는 줄 몰라 합니다. ⓒ 최종규


신일선이라는 분 이야기를 읽다가 소설을 쓰는 심훈 님 이야기를 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고등학교 다니며 심훈 문학을 배울 때, 이분이 ‘영화배우’로도 뛰었음을 배운 적이 있었는가 하고.

.. 심훈 씨가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 심훈 씨는 〈장한몽〉에 출연한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연출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새로운 이동촬영법을 제대로 썼고, 일본에서 갖가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 ..  (81쪽)

조금 더 읽어 보니, 심훈 님은 아예 영화감독 공부까지 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 역사에서 소설쓰는 심훈 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잡지 <季刊 明日香風>(飛鳥保存財團) 9호(1983.가을)를 봅니다. <渡來人の寺 : 檜○寺と坂田寺>(飛鳥資料館,1983)라는 책도 봅니다. 고즈넉한 시골 절간, 또는 자연 품에 고이 안긴 자그마한 집과 숲속 모습을 담은 사진에다가 글을 알맞게 담아낸 잡지입니다. 참 나긋나긋하다고, 눈과 마음을 쉬게 해 준다고 느낍니다. 문득, 우리한테도 이런 잡지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데, 글쎄, 우리 눈을 쉬게 하고 마음을 쉬게 해 주는 잡지가 있던가.

이 유행을 따르라느니, 저 물건을 사라느니, 고 사건이 어떠하느니 하는 이야기만 가득가득 담긴 잡지는 있을지언정, 서로서로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 주는 매무새와 몸짓을 담아내는 잡지는 안 보이는구나 싶은데. 사탕발림 같은 따스함이나 허울좋은 포근함이 아니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우리들 삶과 자연 삶터를 고루 보듬어안는 잡지는 아직까지 깃들이지 못했지 싶은데.

a 책읽는 아이 책 하나만으로 우리 마음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책으로 우리 마음을 넉넉히 살찌울 수 있는 길을 찾고, 우리 마음을 다독여 낼 수 있으면 스스로 책길뿐 아니라 삶길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책읽는 아이 책 하나만으로 우리 마음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책으로 우리 마음을 넉넉히 살찌울 수 있는 길을 찾고, 우리 마음을 다독여 낼 수 있으면 스스로 책길뿐 아니라 삶길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최종규


<天體寫眞の寫し方>(誠文堂新光社,2000)이라는 사진책을 봅니다. 별을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를 다룬 사진책. 일본에는 참 온갖 책이 있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책을 죽 펼치고 넘기다가, 살짝살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책 앞쪽에 끄적끄적 적어 봅니다.

― 누가 깎아내리건 추켜세우건, 저는 제가 가려는 길을 곧게 걸어가면 돼요.
― 조금만 마음쓰면 바뀌는 세상이고, 조금만 애쓰면 나아지는 세상이며, 조금만 움직이면 아름다워지는 세상이에요.
― 좋은 책을 만나서 즐겁게 읽고 있는데 내 마음을 좋게 가꿀밖에요. 내 마음 좋게 가꾸어 내가 하는 일은 나날이 좋아지고 나아질 테지요. 그러니 나한테 깃든 좋은 것을 누구한테나 기꺼이 모두 내어놓을 테고요.
― 좋은 책 하나 만나면, 이 책을 펴내느라 땀흘리고 힘써 온 분들 손길과 마음씀을 함께 받아들이며 고맙게 받아먹어요.

 (3) 한 뭉텅이를 그예

잡지 <삶이 보이는 창> 20호(2001년 4ㆍ5월)를 봅니다. 그리고 잡지 <샘이깊은 물> 마흔여덟 권쯤 끈으로 묶인 두 뭉치를 봅니다. 이 녀석, <샘이깊은 물>을 우얄꼬. 사라져 버린 잡지, 잊혀져 버린 잡지, 날이 갈수록 더더욱 돌아보아 주지 않는 잡지, 헌책방에 들어와도 헌책방 일꾼이나 알아보지 요즘 사람들은 손도 대어 보지 않는 잡지.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 권 두 권 사서 보느라 짝이 안 맞게 모았는데, 이참에 확 질러서, 짝을 맞추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 그렇게 장만해도 좋겠지, 그런데 어떻게 들고 가지?

a 책 고르기 샛장수가 가지고 온 책을 바닥에 쭉 펼쳐놓고, 사들일 책과 버릴 책을 가리고 있습니다.

책 고르기 샛장수가 가지고 온 책을 바닥에 쭉 펼쳐놓고, 사들일 책과 버릴 책을 가리고 있습니다. ⓒ 최종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뿌리〉 아저씨한테 택배로 부쳐 달라고 부탁을 하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잡지 마흔여덟 권에다가, 이참에 가방에 채워 들고 가기 버거운 녀석들까지 몰아서 장만해 보자며 만화책 <다카하시 류미코-시끌별 녀석들>(서울문화사) 스물여섯 권도 고릅니다.

여기에다가 소장판으로 나온 잡지 <샘터> 꾸러미 1(1970.4.∼1971.3.)와 2(1971.4.∼1972.3.) 두 묶음도 고릅니다.

꾸러미 1는 두꺼운 종이로만 되어 있는데, 꾸러미 2은 상자를 천으로 싸 놓았습니다. 소장판으로 묶은 만큼, 벌써 서른 몇 해가 묵은 옛 잡지이지만 한 번도 넘겨보지 않은 듯 아주 깨끗합니다.

<샘터> 첫호를 보면, 맨 첫 장에 나오는 ‘박정희 대통령’ 얼굴과 축하인사가 돋보입니다. 옛 대통령 박정희 씨는 손수 붓글씨를 써서, “근대화의 샘 - 샘터지 창간에 즈음하여. 1970.3.10.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어 주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잡지 편집부에서 적어 놓은 글이 보입니다.

― 동심의 세계는 모든 어른들의 고향입니다. 동심은 우리들을 바르게, 참되게, 슬기롭게 하여 줍니다.

어린이마음이라 …… 유신이라 …… 새마을이라 …… 조국 근대화라 …… 독재라 …… 참과 슬기와 바름이라 …….

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 + 책 +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 + 책 +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헌책방 #뿌리서점 #서울 #용산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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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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