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영어공화국'으로 헌법을 개정하려는가?

[주장] 당선인과 인수위가 꼭 알아야 할 7가지 진실

등록 2008.01.31 11:19수정 2008.02.0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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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찬성만 있고 반대는 없는 밀실 공청회를 열고,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를 ‘제2의 청계천 프로젝트’라고 자화자찬했다. 어이가 없다. 국가 백년지대계라 일컫는 교육정책을, 아니 우리 아이들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 수도 있는 사안을 자기들끼리 얼렁뚱땅 해먹을 태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에 공교육은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헌법 제1조 1항을 개정하는 편이 낫다. '대한민국은 영어공화국이다.' 내친김에 2항도 '모든 권력은 인수위로부터 나온다'라고 고치면 어떨까.

 

필자는 10년간 학교현장에서 영어를 가르쳐온 교사로서, 매우 답답한 심경으로 이 글을 쓴다.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원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첫째, 살인적인 소수점 입시가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은 반드시 실패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입시와 상관없는 내용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영어능력평가 시험'을 치르니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다수 아이들은 영어교사에게 우리말로 수업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둘째, 영어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 하더라도 교실 영어(Classroom English: Be quiet! Attention, please. 따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영어교사의 수준은 꽤 높은 편이다. 발음이 좀 안 좋은 분들이 계시긴 해도, 요즘 임용되는 영어교사들은 원어민 뺨치게 회화를 구사하기도 한다. 문제는 영어로 정말 제대로 가르치려면 6개월 심화연수 가지고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백번 양보해 이번 프로젝트 안대로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게 되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사교육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본디 사교육이란 게 절대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데 그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부모 잘 만난 녀석들만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앞으로는 달러 빚을 내서라도 떠날 것이다. 또한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영어 학원 다니느라고 학교 영어교육을 지금보다 더 등한시할 게 뻔하다. 교육과정을 준수하는 유치원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넷째, 지금도 사회통합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교육 양극화 문제가 더욱 심화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인수위는 영어교육 개혁을 위해 향후 5년간 4조원의 예산을 투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혜택은 돈 있는 집 자식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다. 교실 밖에서는 영어 및 관련문화에 노출되기 어려운 EFL 환경에서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은 수학(修學) 능력에 상당한 수준 차이를 드러낼 것이고, 이는 결국 과외나 학원, 어학연수 등의 사교육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 간 교육격차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영어회화만 잘하면 구술면접만으로 '영어전용교사'로 임용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영어 보조교사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외에서 6개월 정도면 딸 수 있는 TESOL 자격증으로 교단에 선다면, 그건 88만원 세대 영어를 잘 못하는 실업자나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인지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인지 헷갈린다.

 

여섯째, 제발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시라. 국제화 시대에 영어교육은 정말 중요하고 잘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사람만 제대로 배우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과 오용으로 오염될 대로 오염된 우리말글살이를 치유하는 데 과감한 돈과 역량을 투여해야 한다. 요즘 애들하고 말 섞어 보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되는지.

 

일곱째,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원들은 강북에 있는 보통학교에 가서 (거창한 수행원 없이) 일일교사 체험이라도 한번 해 보고 교육정책 입안하라. 현실이 어떤지 학생들한테 꼼꼼히 물어보라. 요즘 우리 아이들 안 그래도 죽을 맛이다. 내신·논술·수능이라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힌 불쌍한 영혼들에게 위로는 못 해줄망정, 세 살부터 기저귀 차고 영어공부 하게 할 셈인가.

  

결론적으로 진정 영어 공교육을 강화할 의지가 있다면, 교사·학생·학부모·교원노조 등 각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치밀한 청사진을 마련하라. 대통령 당선인의 의중이나 인수위원장 개인의 철학을 내세워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백년지대계를 그르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더 불행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다.

2008.01.31 11:19 ⓒ 2008 OhmyNews
#영어공화국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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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껏 놀고, 즐겁게 공부하며, 대학에 안 가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식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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