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대운하의 '원조'였다

등록 2008.01.31 10:56수정 2008.01.31 10:56
0
원고료로 응원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악의 폭정을 저지른 왕인 연산군, 그의 집권 말기 대운하를 파려다 중종반정으로 무산된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조선에서도 서해의 바닷물을 도성까지 끌어들이려는 무도하고 황당한 시도가 있었다. 이 사업을 계획하고 밀어붙인 이가 바로 조선 최악의 군주인 연산이다. 그가 어좌에서 쫓겨나던 해인 연산 12년(1506년) 2월 2일,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리 도감(修理都監)에게 명하여, 장의문(藏義門) 밖으로부터 양화도(楊花渡) 어귀까지 땅을 파서 도량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서 이궁(離宮) 앞으로 흘러오게 하였다."

 

연산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역사(役事)를 계획했던 것이다. 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연산군이 벌였던 이 황당한 토목사업을 '창덕궁 후원에서 경북궁 경회루까지 임시 건물 3천여 칸을 잇달아 짓고 창의문 수각 밑을 꿰뚫어 서강의 망원정 아래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대운하 공사'였다고 말한다. 당시 바닷물이 밀물 때 서강까지 들어오기에 연산군은 경북궁과 창덕궁까지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의 '흥청망청'한 놀이에 흥취를 더하려 한 것이다.

 

운하를 파는 일꾼을 어림잡아 50만으로 추정하고 축성도감, 수리도감을 두어 삼정승을 총책임자로 삼아 공사에 총력을 다했다고 전한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이 독촉하기를 가혹하고 급하게 하여 때리는 매가 삼단과 같으며, 조금만 일정에 미치지 못하면 또한 반드시 물건을 징수하므로, 원망과 신음이 길에 잇달았다고 한다.  중종실록에는 당시 도탄에 빠졌던 민중의 삶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온 고을이 거의 비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역사하는 자는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는데, 더러는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길가에 병들어 쓰러진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그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므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중종실록 원년)

 

연산은 운하를 만들며 친히 시도 한 수 지었다.

 

"놀이만을 위해 백성에게 수고를 끼친 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길이 풍요롭게 살려고 한 것이라네."

 

참으로 명분도 비슷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연산이 폐위되자 이처럼 황당하고 무모한 계획이 즉시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엄청난 국력의 손실과 재정의 낭비,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500년 후인 지금 이 보다 더 엄청나고 무모한 망상에 사로잡힌 토목사업이 '국운 대융성'이라는 명분 아래 벌어지고 있는데 막을 방도가 없으니 오히려 답답한 노릇이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만든 사상 최대의 콘크리트 폐기물 '평화의 댐'이 지금도 뻔뻔하게 세금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그 당시 소위 전문가와 관계 공무원들이 뭐라고 떠들어댔나? 곧 서울이 물에 잠겨 마치 떼죽음을 당할 것처럼 국민을 협박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 집권 세력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이들이 또 엄청난 대국민 사기극을 꾸미고 있다. 우리는 대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2008.01.31 10:56 ⓒ 2008 OhmyNews
#대운하 #연산군 #왕과나 #이명박경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딸이 바꿔 놓은 우리 가족의 운명... 이보다 좋을 수 없다
  2. 2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3. 3 카자흐스탄 언론 "김 여사 동안 외모 비결은 성형"
  4. 4 '헌법 84조' 띄운 한동훈, 오판했다
  5. 5 최재영 목사 "난 외국인 맞다, 하지만 권익위 답변은 궤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