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할 무렵 독립한 발트 3국. 빨간 선은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km에 걸쳐 이어지는 '발트의 길'이다.
오마이뉴스 고정미
라트비아라는 나라가 있다. 온통 영어 한 가지에만 미쳐 돌아가는 인수위 분들이 그런 작은 나라를 알기는 할까 모르겠다만, 17년 전 소련에서 독립해 엄연히 유럽연합의 일원이 된 작지만 아주 알찬 나라다. 어찌 보면 우리가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특별히 문제가 없을 수 있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나라님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그 작은 나라에서도 '날 좀 보고 배우쇼' 하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아, 우리가 '비정상적인 국제화 바람'에 빠져 관심을 전혀 두지 않던 그 나라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인구가 약 260만 명에 불과한 라트비아이지만, 이들에겐 자신들만의 언어가 있다. 그 전에도 주변 국가들에게 연이어 지배당했고 옛 소련 시절엔 자국 언어가 알게 모르게 탄압받는 슬픔을 겪었지만, 지금은 자국 언어와 문자를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라트비아인 중 약 40%는 러시아 사람이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볼 때는 40%이지만 수도 리가만 놓고 보면 그 비율이 60%에 육박해, 라트비아 현지인들은 수도에서 소수민족에 속할 노릇이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냉전 시절 소련의 공화국들 중 가장 발전했던 라트비아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라트비아에서 가정을 일구고 정착해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어 외에 현지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라로서 라트비아는 언어를 마음껏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얻었지만, 라트비아어가 처한 존재적 위기는 사라질 줄을 모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구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자국에서마저 언어 사용이 줄면 자칫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니다.
헛바람만 든 인수위 어르신들, 라트비아란 나라 아십니까? 언어란 한 나라의 존재 자체와 연관된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던 라트비아 정부는 언어의 생명력과 국가경쟁력 사이에서 몇 년을 고심한 끝에 대안을 내놓았다.
라트비아 내에 존재하는 러시아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 비율을 최대 60%로 높이기 위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2004년 시작된 이 조치는 러시아 학교를 포함한 외국인 학교에서 라트비아어 사용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궁지에 빠진 라트비아어를 구할 특단의 조치라는 점에서 현지인에겐 환영받을 만한 조치였지만, 이 조치는 초기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라트비아 교육개혁의 문제는 요즘 인수위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전하는 영어몰입교육이 낳을 풍경과 아주 비슷하다. 겉으로는 영어로 수업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어로 된 교과서를 펼쳐놓고 한국어로 몰래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일단 러시아 학교 내부에선 예상했던 대로 반대가 심했다. 그동안 마음 놓고 사용했던 러시아어가 주변 언어, 2류 언어로 전락한다는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의 경우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텔레비전에서 라트비아어를 접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라트비아어로 대화하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아울러 라트비아어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추진론자들은 이 조치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그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