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교육은 왜 필요한가?

[나의 논술 이야기2] 중립은 없다

등록 2008.01.31 16:04수정 2008.01.3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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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립할래요."
"저는 가운데 하면 안 되나요?"

토론 시간이 오면 아이들의 입에서는 어김없이 이런 말이 나온다. 황희 정승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은 것 같지도 않고, 극단적인 의견은 좋지 않다는 사회적 경험의 결과인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이런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난 결코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금을 올리자는 주장이 있다고 하자. 중립이면 뭐야? 세금을 올리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어떤 의견을 취할까 망설이는 아이를 다그쳐서 어떤 쪽이든 한쪽 의견을 택하게 한다. 그리고 토론을 하게 한다. 그런데 머리가 조금 큰 아이들은 이러한 나의 편가르기에 맞서기도 한다.

"선생님! 세상을 어떻게 둘로만 나눠요? 그렇지 않은 대안도 있을 수 있잖아요?"

이 정도로 논리적인 항변을 하는 아이들은 제법 논술을 오래한 아이들이다. 토론을 자주하면서 반드시 둘 중 하나의 의견이 옳다고만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토론을 위해서 둘 중 하나의 의견을 택하게 한다.

나도 세상 일이 딱 부러지게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솔직히 둘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문제를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어른들이나 옛 선인들은 중용의 도를 강조한다. 세상사를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토론은 생각할 기회를 준다

문제는 아이들이 중립을 선호하는 이유가 중용의 도를 터득하거나, 세상을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들이 중립을 선호하는 이유는 생각하기 싫어서고 생각할 능력이 없어서다. 중립을 선택하는 아이 중에 정말 문제를 깊이 이해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학생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중용의 도를 거부하고 흑백논리를 선택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격렬하게 토론을 하면서 자기 생각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자신의 의견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경우는 일상 생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말은 하지 않고 괜히 불만스런 표정을 짓거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투덜대는 아이를 접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집 효원이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데 괜히 토라져서 아무 말도 듣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번은 효원이보다 두 살 많은 형이 있는 친구네가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신나게 놀았는데 형이 갈 때쯤 돼서 갑자기 투덜대기 시작했다. 분명 불만이 가득한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니 왜 그런지 알 수 없었고, 결국 아내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아이는 '생각하는 의자'에 한참 앉아 있더니 엄마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응, 목욕 끝나고 형이 내 옷을 입고 가서 싫었어."
"왜? 그 옷이 어때서?"

"음~ 그 옷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거든."
"효원아!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냥 화부터 나서 이야기를 못했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 그래야 엄마가 들어준다거나 못 들어준다고 말할 것 아니야. 이야기를 안 하면 아무도 효원이 마음을 몰라."

이렇게 달래주자 아이는 다시 환한 표정을 지으며 놀았다. 하지만 만약 이때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명확하게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아이를 나무라는 목소리는 커지고, 아이 속에는 불만만 쌓였을 것이다.

토론은 깊이 있는 이해를 도와준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주어진 생각을 외우고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 어른들의 말, 책에서 읽은 말은 전부 옳다고 여긴다. 기존의 지식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거의 없다. 어릴 때부터 부모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누누이 교육받은 결과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철저히 통제한 결과다.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든지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하면 사람의 폭력성이 길러질까?"

이것은 전쟁놀이를 다룬 책을 읽고 5학년 학생들이 벌였던 토론 주제다. 당연하지만 나는 철저하게 두 편으로 나누어 토론하게 했다. 이 주제로 토론을 하면 여학생들은 대부분 폭력성이 길러진다는 의견이 많고, 남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오락거리일 뿐이라는 의견이 많다.

"뉴스를 보면 게임에 중독되어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게임은 폭력성을 길러줍니다."
"맞습니다.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일부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공부하다 스트레스 받아서 잠간씩 하는데 그게 왜 폭력성을 기릅니까?"
"그렇게 잠깐 하다 보면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게임 속에 나오는 캐릭터가 가짜라는 건 다 압니다. 그러니 문제가 없습니다."

게임의 폭력성 문제는 남학생들의 경우 직접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토론이 상당히 격렬한 편이다. 여학생들도 남학생들을 지켜본 경험도 있고, 남학생 못지않게 게임을 해 본 경험자도 있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사실 올바른 토론이라면 마지막에는 새로운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

그런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흑백논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합의점을 도출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솔직히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토론을 마칠 때쯤이면 나는 늘 토론을 보며 들었던 생각을 이야기 한다.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실제 사람이 폭력적이 되는지는 너희의 토론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어. 그리고 분명한 건 전쟁 게임을 자주하다 보면 실제 전쟁 장면을 보고 별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거야. 즉 폭력성이 키워지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폭력에 무뎌지는 거지. 우리는 실제 전쟁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극적인지 늘 깨어 있어야 해. 우리가 폭력에 무뎌지는 순간 우리가 읽은 책과 같은 비극이 우리를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져."

만약 이 말을 처음부터 했더라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찬반으로 나누어 격렬하게 토론한 뒤에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은 자기 생각과 토론의 내용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가 깊어지는 셈이다.

흑백논리로 나누어 찬반토론을 시키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결론, 새로운 합의점은 흑백의 논리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비교한 후에 나올 수 있다. 뛰어난 창조성이나 심오한 대안은 기존의 상황과 견해를 깊이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방의 견해와 처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섣부르게 선택하는 합의는 이도저도 아닌 양비론에 빠지게 할 뿐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의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해야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는 능력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논술 #토론 #박기복 #글쓰기 #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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